* 사흘 간 푹 쉬었다. 일이 조금도 없었다. 월요일에는 점심 약속이 있어서 통역사 친구들과 수다를 잔뜩 떨고, 운동을 하고, 바로 또 다른 통역사 친구와 급 만남을 가져서는 술을 진탕 마셨다. 다음 날인 화요일에는 전날의 숙취에서 회복하는 데 하루를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차피 일도 없었으므로 하루종일 드러누워서 검블유를 정주행하다가 저녁에는 동생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급 저녁을 같이 먹었다. 이렇게 쉬었다고는 하지만 꽤나 바빴는데 오늘은 정-말로 아무 일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짓고 마지막 남은 드라마 한 화를 보면서 밥을 먹은 뒤, 카톡으로 낄낄거리기나 하고 집 정리나 좀 하다가 휘적휘적 카페에 나와 반 년만에 블로그에 일기를 좀 써보려고 앉았다. 다이어리를 펼쳐서 확인해보니, 이렇게 주중에 사흘이나 아무 일이 없었던 건 거의 1월 말-2월 초, 구정 즈음이 마지막이었다. 노는 일수를 이틀 정도로 줄여봐도, 부담되는 다음 일이 없는 상태라는 단서를 붙이면 거의... 상반기 중 휴가를 떠난 때를 제외하고는 그런 날이 없었던 수준이다. 특히 지난 2개월은 거의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매일 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다녔다. 이렇게나 바빴으니, 지치는 건 너무 당연하지. 

일기를 써두지 않아서 언제쯤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프리랜서로 전향한 1년차인 작년에는 일이 좀 많을라치면 금방 버거워졌다. 친한 언니들과 대화를 하면서 테트리스를 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여러 번 서로 공감한 적이 있는데, 정말 딱 그런 느낌이 꽤나 자주 찾아왔다. 테트리스 타일들이 80% 선 언저리에서 계속 쌓이고 터지고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이번 판을 연명하는 그런 느낌. 그게 아마 한 주에 일이 서너 건 잡혀있거나 하면 중간 어디쯤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테트리스 공간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100% 지점을 잘못 설정해둬서, 이 정도 워크로드에도 이미 80% 정도를 허덕이는 기분이 드는구나, 하고. 그래서 마음 속으로 100% 선을 새로 그었다. 100%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주중 5일을 연속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판을 새로 깔고 나니 신기하게도 허덕이는 느낌은 거의 없어졌다. 일이 없으면 쉴 수 있어 기쁘고, 있으면 당연하고 감사한 상태로 올 상반기를 났다. 

그런데 아무리 테트리스의 판을 넓혀도, 프리랜서로 매일 일하는 건 몸에도 정신에도 무리가 되는 일이다. 일은 기본적으로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매번 새로운 부담과 불안을 안고 일터로 뛰어드느라 잠을 설치거나 악몽을 꾸는 건 예사였다. 그렇다고 덜 부담스러운 일이 있을 때면 좀 사정이 나은가하면, 오히려 그런 때는 내가 일부러 스스로를 몰아세워야 해서 어떤 면에서는 더 힘들었다. 부담과 불안에서 나오는 특유의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면 일을 망치기는 너무 쉽기 때문에, 일에서 불안하지 않으면 내가 불안하지 않아서 일을 망칠까봐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런 불안이라도 느껴야 안심이 됐다. (적고 보니 정말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다.) 일을 하면서 분명 설레고 뿌듯한 순간도 많았지만 매일같이 불안에 떠는 생활은 나를 아주 지치게 했다. 매번 고비를 넘기는 심정으로 일을 하니 그럴 수밖에. 불안이 너무 버거울 때면 나는 생각하곤 했다. 어떤 일을 할 때 부담이 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으면, 내 능력에 비해 너무 편한 일을 하고 있는 거니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거라고. 지금 느끼는 이 불안은 내가 제자리에 와있다는 증거라고. 여전히 저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런 판단과 심정적 피로는 다른 문제다. 

일기를 쓰다보니 내가 왜 지쳤는지 두 갈래로 이해가 된다. 우선은 내 능력의 한계와, 내 능력이 충분치 않다는 불신 때문에 지쳤다. 능력을 기준으로 내가 적당한 위치에 와있는지 가늠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능력에 대한 현실 진단과 끊임없는 갈증이 있을 수밖에. 이건 공부를 해서 채우면 조금은 나아질 부분일 거다. 다음은 내가 만들어낸 불안 때문에 더 지친 거였구나. 앞선 잣대를 들이대서 내 능력에 조금 안락하게 맞아들어가는 일을 할 때도 온갖 통제 불가능한 변수들을 생각하면서 불안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괴롭혔으니. 이 부분은 어떻게 하면 건강한 긴장감은 유지하면서도 나를 지치게 하는 거짓 불안은 최소화할 수 있을지 조금 고민을 해봐야겠다.

갑자기 깨달은 내용만 대충 휘갈겨놓고, 일단은 일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2019년 상반기에 대한 단정한 소회를 남기고 갔더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간만에 글을 써서 그런지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된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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