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시간이아주많은어른이되고싶었다 - 해당되는 글 1건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산문집 (2005-2008)
전은경 옮김
푸른숲 2009

나는시간이아주많은어른이되고싶었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피터 빅셀 (푸른숲, 2009년)
상세보기

  비틀즈 CD를 사서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을 (새로이) 집어들게 되었다. 이 책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한 곡이 있어 링크한다.

The Beatles - Nowhere Man


  어쩌라고! 읽다보면 어쩌라고 싶을 때가 있다. 때로는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현대사회(는 좀 거창한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간에 '지금 현재')를 비꼬지만 그러면서도 신기하게도 그의 태도 자체는 별로 과하지 않다.  아주 특별한 이야기 아주 대단한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인데 그 성실한 관찰(본인은 아니랬지만)과 재치있는 언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기다림을 기다리며
  기다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기다리기를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열심히 기다릴까?
  아마 기다림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스물한 밤만 더 자면 오는 생일 기다리기, 크리스마스 기다리기, 그리고 드디어 12월 24일 당일이 되면, 이제 선물을 뜯어도 된다는 허락을 기다리는 그 긴 시간. 유치원 입학 기다리기, 학교 입학 기다리기, 잉크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 기다리기, 열두 살이 되기를, 열여섯 살, 열여덟 살, 스무 살이 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 그리고 마침내 아흔다섯 살이 되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기다림. (15쪽)

  우리는 왜 기다리는 걸까? 왜 기차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복도에 서서 기다릴까? 아마 우리가 기다림만큼 고통스럽게 배운 건 없기 때문일 테지. 유치원과 학교 입학 기다리기, 졸업 기다리기, 은퇴 기다리기, 그리고 어쩌면 기다림조차 기다리기. 병원에 약간 일찍 도착해서 그 앞을 오가며 기다리기, 이 기다림이 끝나면 대기실에서 또 기다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의 기다림을 기다리기. (18쪽)

  기다림으로 채워도 좋을 시간을 너무도 빽빽하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많이 부여받았기 때문에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나는 국민학생 언니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럼 도시락을 싸가서 친구들과 노나먹을 수 있을 것이라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초등학교 급식세대가 되었으므로 그런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사실에 많이 서운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기다림만이 회자될 뿐이다. 나는 여섯살 때부터 월간 만화잡지를 읽었다. 소녀만화 잡지 중에 '밍크'는 간간이 보는 정도였고 '나나'를 애독했는데 지금은 폐간되고 없다. 나는 매 월 다음 달이 오기를 기다려 '나나'를 샀다. 여덟살 때 반여동으로 이사 온 다음에는 도서대여점이라는 신세계를 만나 동네 책방 주인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으며 단행본들을 섭렵했는데 그때도 매일같이 신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책방에 언제쯤 새책이 들어오는지를 꿰고 있을 뿐더러 아주머니께서 날 위해 책을 빼 놔 줄 수도 있는 뭐 그런 단골 손님이었다. 일곱살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보다 어릴 때는 엄마 아빠의 안경을 동경하여 안경을 쓸 날을 기다렸다.
  지난 학기 사진 수업을 하면서 Anna를 모델로 포토스토리 촬영을 했다. 그때 알게 된 재밌는 (국적 불명의) 크리스마스 풍습이 생각났다. 일단 영국에서 축하하는 건 확실하니 영국에서는, 으로 문장을 시작해도 괜찮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Advent Calender라고 부르는 초콜릿 든 장난감(?)을 판다고 한다. Anna가 Waitrose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엄청나게 쌓아놓는데 금방 동이 나 버린다고. 간단히 말하면 12월 달력이 찍혀 있는 초콜릿 통인데 달력에 찍힌 날이 되면 그 칸을 열어서 안에 있는 초콜릿을 먹는 것이다. Anna도 집에서 보내준 걸 들고서 12월이 다가오니 이제 이걸 시작할 수 있다며 마구 들떠 있었다. 영국에서 보낸 건데 그걸 먹으려고 며칠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일찍부터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나보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니 며칠 앞으로 다가온 발렌타인 데이 생각이 난다. 스케줄러에 발렌타인데이 하트뿅뿅 이런 거 표시해놓을 생각이 전혀 안 드는 올해의 발렌타인 데이. 그날이 발렌타인 데이인지 어떤지도 모르고 미리 풀코스 데이트 약속을 잡아놓았으니 초콜릿을 사긴 할테지만 참 기다려지지는 않는다. (데이트는 기다려진다. 그나저나 내가 진짜로 선물하고 싶은 건 Pedro Javier Gonzalez의 비틀즈 노래 기타연주 음반인데 눈에 보이는 음반점마다 확인해봐도 모조리 장기품절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2010년 화이트데이에 B가 준 '손수 만든 초콜릿' 선물 상자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적당한 크기 무난한 색상의 정사각형 통이어서 약상자로 유용하게 쓰고 있다. 그때 받은 초콜릿은 고맙다며 기쁘다며 다 먹긴 했지만 참으로 뜨악스러웠다. 정말 미안하다. 그걸 만들고 있었을 정성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지만 나는 애인에게 손수 만든 초콜릿을 선물하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친구한테 받는 것은 또 괜찮다. 모르겠다 인간이 왜 이리 꼬였는지. 어쨌거나, 내게도 기다려지는 몇번의 발렌타인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발렌타인 데이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때 정사각형 선물 상자를 썼었더랬는데.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하늘색 정사각형 상자에 복슬복슬한 포장재를 채우고 개별포장된 동그란 초콜릿들을 넣었던 것 같다. 발렌타인 데이까지 포장을 고민하며 기다리고, 또 당일에는 그 초콜릿을 건네줄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루종일 기다린 끝에 집에 갈 때가 되어서야 초콜릿을 그 아이가 입고 있던 외투 주머니에 넣어 주었는데 멋들어진 말 한마디 못 했던 것 같다. 그 후 몇번의 (대충 세어본 결과 적어도 대여섯번) 발렌타인 데이들을 기다려본 것 같은데 제일 처음이랍시고 이것만 이렇게 강렬하다니 다른 날들이 섭하겠다.

우리가 아직 기다릴 수 있던 시절에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면 기차에서 글을 쓰기가 불가능해진다. 이때의 기차는 나에게도 조바심치는 장소가 되고, 기다림 자체가 힘겨워진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예를 들면 베를린—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는지 —17시 24분, 베를린 도착—상당히 정확하게 예고되는데도, 아니 사실은 그래서 더 끔찍하다. 예고는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고는 기다림을 방해하니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42쪽)

  글쎄, 하지만 우리가 글을 쓰지 않고 조바심내는 그 순간이 사실은 더 '기다림을 기다리는' 상태에 근접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책을 읽으며 지하철을 타고 한 바퀴 돈다고 한들, 그 지하철의 풍경을 볼 수는 없을테니까. 공간이 아니라 나의 일로 시간이 귀속되면 그건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기도 하다. 알고서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태도가 문제일 뿐. 그러고보면 정시 출발 정시 도착 같은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지젯은 참으로 순수한 기다림을 내게 안겨주었다.



오늘은 일요일
  일요일의 산책. 그렇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들 때문에 일요일에 산책을 하는 게 아닌지 늘 의심스러웠다. 교양 있는 가족은 산책을 하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요일의 산책.
  그렇다, 나는 산책을 가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 의복을 사지 않고, 예전에 입던 일요일 정장을 평일에 입어 닳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례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더 이상 의례를 치르지 않게 되자 나는 해방됐다고 느꼈다. 이제 자유를 누리긴 하는데, 일요일은 더 이상 일요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왠지 모르게 일주일 내내 일요일을 기다린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일요일을 기대하며 장을 본다.
  그러고는 스튜 앞에 앉아, 평일에 먹는 구운 소시지를 갈망한다. 구운 소시지가 외로움을 덜어주리라고 상상하며. (22쪽)

  어제의 해도 오늘의 해도 쭉 그냥 해일 뿐인데 무슨 호들갑을 떨며 1월 1일이라는 이유로 일출을 보러나가냐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야 그 생각이 진심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일출을 보러 나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해가 그 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1월 1일의 해가 특별한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를 보러 몰려나가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가? 나는 이제 그런 의례가 아주 반갑다. 단지 그 존재 만으로. 몇번이고 읽으면서 애써 분석해낼 필요가 없는, 강렬한 일상의 상징이다.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의례'
진짜 열정에는 반복이 필수적인데 지금은 최신 시사성만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최신 시사성은 기존의 시사성을 영원히 대체한다. (50쪽)
아니다, 나는 영화나 재즈를 향한 열정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의례를 잃었다. 열정이 깊이 간직되어 있는 의례를……. (52쪽)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
  고향은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언제나 냄새를, 특히 양배추와 파 또는 탄 음식과 같은 부엌 냄새를 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도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뢰스티(스위스식 감자전)가 갈색이 되면 안 되고, 가장자리가 검게 타면 더더욱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타지 않고 노릇노릇하게만 구운 뢰스티도 아마 좋을 테고 어쩌면 더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은 더 이상 뢰스티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억나게 하지 않는다면 품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26쪽)

  맛이나 냄새같은 감각이 기억을 완성하는 일은 흔하고, 그런 기억은 다른 기억들보다 농도 짙게 느껴진다.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고 나서 컵라면을 먹지 않으면 그건 놀이의 완성이 아니라고, 가게가 도로가에 있더라도 친구랑 학원 쉬는 시간에 떡볶이니 꼬지니 하는 걸 호호 불며 사먹지 않으면 무슨 재미냐고, 건강에 도움될 것 하나 없는 불량식품이라도 하굣길에 꾀돌이 아폴로 맥주사탕을 쥐고 오지 않으면 얼마나 아쉬우냐고. 반쯤은 결벽증이 되어가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쁜 짓을 하는 것의 기쁨.



과거가 없는 자그마한 술집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과거를 소유하는 일은 이렇게도 일찍 시작된다!
과거, 그러니까 옛날이 지금보다 나은 이유는 지금보다 뭔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것. 여기에는 모든 것이 지금과 아주 달랐을 때 자기도 그걸 경험헀다는 기억도 포함된다. (29쪽)

  이 부분을 읽을 때 W가 해줬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났다. W네가 새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 집을 착각해서 옆동인지 아무튼 다른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잠시 둘러보고 집 구조(와 크기)가 예정된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어른들이 제대로 된 집을 찾아갔을 때 어린 W는 진짜 자기 집을 보며 여기 우리집 아냐 우리집은 훨씬 넓단 말이야 하며 펑펑 울었단다. 어린 아이는 잘못 찾아들어간 집을 순식간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아이는 그 집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그 집의 기억을 소유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집에서 오래 살았을 진짜 집주인도 그런 기억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추억은 언제까지나 내 것이고,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그 소중한 '내 것'을 나누고 싶어한다.

선불 버스표와 선술집
음식은 맛있었다. 그녀가 요리를 조금 못했다고 하더라도——그런데 요리를 못했으리라는 상상은 되지 않는다——사람들은 아마 린다에게 갔을 것이다. 린다는 사실 주인이 아니라 음식점 그 자체였다. 미식 평론가들의 '가격 대비 만족'이라는 궁색한 평가가 맞지 않는 음식점. 그녀가 곧 음식점이었다. 바로 이 점이 '손님이 왕'이 아닌 그곳의 큰 매력이었다. 그녀는 여왕이었다. 권력은 그녀과 쥐고 있었고, 호의도 그녀가 베풀었다. 그녀에게 오는 사람들은 여왕을 알현하는 것이었고, 여왕의 손님이 됐다는 감격적인 느낌을 즐겼다. 이런 우아함에 비하면 "손님은 왕이다"라는 진부한 문구는 얼마나 초라한가.
  왕이 되어 신하들을 찾아가는 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아마 무척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자신이 위인인 사람들, 자기 의견을 지녔으며 이를 뚜렷하게 밝히는 사람들, 자기 기분과 고집을 지닌 사람들을 방문하는 게 더 좋다. 나는 술집에서 손님일 뿐 아니라 방문객도 되고 싶다. (36쪽)



편안하고 질서 있는 무질서
  아니, 나는 무질서 속에서도 편안하지 않다. 내 뮐서는 제화공 해프리거의 무질서와 같지 않다. 내일이나 모레 또는 주말에 다시 한 번 청소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혹시 평생 잘못된 것을 추구한 건 아닐까? 정리하는 데 늘 실패한 게 아니라, 무질서를 만드는 데 실패한 게 아닐까? (58쪽)

  재미있는 접근이로세. 내가 늘 강조하는 바를 적어두고 가야겠다. 책상 위가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책상 청소를 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편안하고 질서 있는 무질서다.



'이해하기'보다 '듣기'
그들[지적장애인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이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곳에서 청중에게 이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듣기'란 '이해하기'보다 훨씬 단계가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대단찮은 청중일 것이다. 언제나 성급하게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 (103쪽)

  읽기는 듣기의 형태 가운데 하나다. 그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약간 교육을 더 받고 조금 더 숙달된 지금은 읽으면서 성급하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순진무구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장 파울을 읽으며, '이해하기'를 거부하려고 약간 노력한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다. 귀 기울여 듣기에는 관용이 필요하고 선입견이 없어야 하는데, 이른바 경험이라는 게 많아질수록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105쪽)
:다른 이의 경험을 섣불리 나의 것으로 치환하지 않기.



작은, 아주 작은 소속감
나는 이 년 동안 그에게 인사했지만, 그는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 둘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고, 우리는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때ㅜ터 그는 싹싹하게 인사한다. 그가 자기 손을 가슴에 얹고 몸을 약간 굽히며 인사를 하면 나는 항상 기분이 좋다. 예전에 그가 인사에 대답하지 않을 때, 나는 거의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이제 드디어 같은 버스를 타는 셈이다. 나는 사실 그를 모른다. 그의 이름도, 그가 간직한 이야기들도. 그도 나를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그는 이제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127쪽)

  흔들리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옆자리 사람에게 스르륵 기댈 때가 있다. 누군가 내게 기대어 올 때도 있다. 그 고단한 머리를 쳐내지 않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함께 이곳에 있었던 우연을 소중히 여기는 최소한의 행위 (또는 비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긴 개콘 '불편한 진실'에서는 미모 출중한 자가 기대어오면 어깨를 들이대고 반대의 경우 머리를 튕겨 낸다고 하긴 하더라마는...



단어가 없어도 나눌 수 있는 대화
  "그 여자[발리 여자]에게 어떻게 그런 고통을 줄 수 있어요? 흥정을 했어야죠. 그 책은 그녀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돈이 필요해서 자기 소유물과 헤어져야 한 거예요. 그 여자에게는 작별을 끌고 늦출 권리가 있었다고요. 그렇게 빨리 흥정을 끝내다니, 당신은 그녀를 모욕한 거예요."
  그녀가 요구했던 가격보다 더 주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꽤 훌륭한 줄 알았다. 흥정이 가격뿐 아니라 생동감, 교제 및 대화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스위스 사람인 내가 어찌 알았으랴. 그때부터 나는 되도록 길게 흥정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원래 가격보다 더 주었다. (163쪽)

  요즘 외국인들과의 융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외국인들이 이제 좀 우리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언어를 배워서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누가 시간을 내서 그들과 친근하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현금 인출기와 차표 자동 발매기가? 어쩄든 융화란 이런 것과는 다르다. 우리 언어를 잘하며너도 융화를 동경하는 외국인들도 많고, 융화를 원하는 내국인들도 점점 많아진다. 융화는 외국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만을 목표로 삼는 사회의 문제다. 효율은 결국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 되므로. (164쪽)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0) 2012.07.31
그리스 인 조르바  (0) 2012.07.31
애니 홀  (0) 2012.02.24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0) 2012.01.29
상실의 시대  (0) 2012.01.29
      기록  |  2012. 2. 12. 17:57



부움's Blog is powered by 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