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나는 왠지 딴짓의 정상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토요일에 큰 건 리허설이 있는데 자료를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종일 집에 처박혀있어 놓고는 딱히 한 건 없고, 지금 막 해나 개즈비의 "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봤다. 이 스탠드업 코미디 쇼는 정말 보기 드문 수작이다. 별점 6개 주고 싶은 그런 마음. 내가 재밌게 본 코미디쇼는 이거 외에는 앨리웡, 하산 미나즈, 트레버 노아 (그런데 트레버 노아는 데일리쇼나 팟캐스트에서 얘기 들을 때는 꽤나 브릴리언트한 반면 넷플릭스에 올라온 쇼 두 개 봤는데 둘 다 갸우뚱하긴 했다)의 쇼가 있는데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나는 소수자 정체성에서 나오는 펀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지적으로 자극도 되어야 하고. 반복이나 남을 깎아내리기를 통해 그저 웃기기만 하려는 건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아무튼. "나의 이야기"는 다시 보고 싶을 뿐만 아니라 아예 트랜스크립트를 받아서 읽고 싶다. 그리고 엄마에게 잘 번역해서 소개해주고 싶다. 오늘 한 딴짓은 일단 청소, 빨래, 장보기, 요리, 다이어리 정리 등이 있는데 이 쇼를 굳이 다시 본 게 정상이고 이제 내일부터는 후다닥 산을 달려내려와 공부를 할 수 있길. 

* 주말에 본 영화 "툴리"도 정말 훌륭한 작품이었다. 보고 나오면서 첫 인상은 좋은 영화인 것 같긴 하지만 너무 후다닥 끝난 거 아냐? 였지만 곱씹을수록 아름답다. 물에서 숨이 막히지 않는 인어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도. 툴리와 마를로의 투샷이 지니는 의미도. 툴리가 하는 말들이 마를로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도. 미디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엄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라고 해봤자 현실은 따라오지 못할 것이지만). 나무되기 놀이를 가르쳐주는 장면도 전체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의미가 있고. 다시 보고 싶다. 엄마랑. 

* 바쁘다고 어쩌고 저쩌고 나불나불거리긴 하는데 사실 그렇게 바쁘진 않은 건지도. 

* H언니와 S언니를 만나서 맥주 마시다가 뭔가 이야기를 했는데 제대로 전달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그 이후에 든 생각을 조금 적어놓는다. 툴리와도 연결되는 얘기다. 여자다움이라는 건 대체 뭔가? 나는 여자다움을 생각하면 엄마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기에 엄마는 거의 수퍼우먼이다. 열정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랑했고, 열정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절박함으로 그림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 와중에 나와 동생도 깊은 사랑으로, 정신적 회복탄력성이 높고 건강한 수준의 자존감을 지닌 성인으로 키워냈다. 그러면서도 딸과 며느리로서의 역할도 매우 모범적으로 해냈다. 꽤나 흠이 많은 남편과도 상당히 원만한 수준의 관계를 지켜왔다. 그런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정신을 돌볼 줄 알았고 사유할 줄 알았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을 보내고 애정을 표현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저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었는지, 나는 상상이 잘 안 될 지경이지만 아무튼 다 해냈다. 현명하고 진실된 사람. 엄마는 그런 사람이지만, 유독 여성성의 영역에서는 자신이 없다. 아빠가 좋아하는 어떤 스타일로 옷을 입지도 못하고 꾸미지도 못한다는 사실에, 두 아이를 낳고 저 모든 일을 하느라 만들어진 자신의 "못난" 육체에 컴플렉스가 심하다. 엄마의 존경할 만한 점이 저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엄마를 만나 대화를 하면서 화를 낼 일이 생긴다면 그건 십중팔구 여자다움과 연관이 있다. 자기 몸무게가 얼마인데 그래서 옷을 입으면 예쁘지 않은 몸무게가 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없다느니, 무엇을 입을 수 없다느니, 무엇을 살 수 없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화가 치밀어오른다. 대체 그 여자다움이 무엇이라고 이런 훌륭한 것들을 이뤄낸 사람이 그 부분에서만큼은 자기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면서 고작 1, 2 킬로그램에 매일 같이 정신적 에너지를 쓰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왜 그 부분에서만큼은 마치 자신이 남편에게 매력적인 여자로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모종의 미안함을 안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 가정이 거의 전적으로 엄마의 공으로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데도? 고작 그딴 몇 키로의 몸무게와, 소위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선호하지 않는 자신의 취향 때문에? 이런 생각은 내 안의 울분으로 남았다. 

그날 언니들에게 내가 메이크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를 했는데 굉장한 메타 인지를 하고 있구나, 하는 평을 들었다. 메이크업에 대한 내 태도란 이런 것이었다. 일하러 갈 날이 연이어 있어서 며칠 간 계속 메이크업을 하고 나면 어느새 나도 그 얼굴이 익숙해져서 메이크업을 지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게 된다. 그러면 일이 없는 날도 거울을 보면 메이크업을 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럴 때, 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면 또 얼굴이 볼만해진다. 다시 익숙해지는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내게 피부가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말한다. 이날도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내가 주로 메이크업을 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메이크업을 한 얼굴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내 얼굴은 그게 디폴트라고 인지하고 있어서 더욱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똑같은 피부 상태라도 내가 늘 풀메이크업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메이크업을 지운 순간 내 피부를 보고 여전히 정말 좋다고 말할 사람은 지금에 비해서는 훨씬 적을 거라고 본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도 여느 여자들처럼 거울을 보면 내 잡티나 모공이 보인다는 거다. 그런 것들을 다 가리고 싶고 부끄러워지는 순간도 분명 있다. 나도 남의 피부를 보고 부러워하곤 한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으면 아니다 내 피부는 아주 엉망진창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게임에 참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나도 모르게 휘말려 있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그 게임에서 비껴서 있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을 두고 메타 인지를 하고 있다는 평을 들은 것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메타 인지를 같이 했으면 좋겠다. 내가 거창한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없지만, 내가 하는 생각들은 가급적 같은 선상에 있도록 하고 싶다. 내 주변의 많은 여자들은 외국에 나가면 한국의 억압적인 미의 기준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느낌을 받고 그래서 좋았다면, 그걸 한국에서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느 정도는 물론 양보를 하게 된다. 사회가 기대하는 수준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그 수준을 반드시 맞춰야만 하는 때가 아닌 순간들도, 삶에는 얼마든지 있다. 거부할 수 없다고 느끼는 선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면 좋겠다. 그래서 적어도 내 주변에서만큼은 내가 그런 자유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얼굴에 칠을 도무지 별로 하지 않는 내가 못 버리는 한 가지는 바로 립스틱이다. 눈썹을 안 그리고 맨얼굴로 나가는 날에도 입술만큼은 뭔가를 바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원래부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입술에는 색이 있어야 한다는 걸 배운 순간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배우기에는 상당히 늦은 때였다. 이십 대 중후반 무렵이었을 테니까. 어느날 부산에서 엄마가 내게 이렇게 말한 순간이 기억이 나는 것이다. "다른 건 다 안 하더라도 입술 만큼은 뭘 발라야지!"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입술에 립스틱을 칠했다. 확실히 얼굴에 생기가 확 살아났다. 그날 이후로 나는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내 얼굴은 역시 생기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건 확실히 학습이다.

* 아... 이런 일기까지 써버리다니. 확실히 딴짓의 정상에 있는 게 맞구만. 더 쓰다가는 잠을 못 잘 것 같고 내일은 꼭 아침 일찍부터 공부를 해야 하니 일단은 그만 접어두고 와야겠다. 사실 지난 몇 달 간 일을 하면서 느꼈던 공허감과 뿌듯함에 대해서도 꼭 기록해놓고 싶은데. 바쁨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런 영향의 많은 부분은 사실 내가 바쁨에 대해 조금 잘못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 그런 깨달음 뒤에 나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기록해두고 싶은데, 일단은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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