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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수키 김 (2004)

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2005

 


통역사

저자
수키 김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5-10-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국어 통역사로 일하는 수지 박이 부모님 살해에 관련된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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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책 정리를 하다가 책등이 분홍빛으로 바랜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잡았다. 언제 처음 읽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일 것이다, 신간으로 나온 걸 사 읽었던 것 같으니까. 책 곳곳에 접어놓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가 접어놓은 페이지를 꼼꼼히 읽어보면 꼭 아, 이 부분 때문이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곳이 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종이를 펴기만 할 뿐 어떠한 표시도 남기지 않는다. 대신 이번에 줄을 그은 곳은 이런 부분들.

 

  데미안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뉴욕 사람들은 바쁜 게 아니야. 자기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을 뿐이지.” (32)

 

보기에 예쁘기는 하지만 원래 있던 곳, 그러니까 네덜란드의 만년 들판이나 노스캘리포니아의 비탈진 계곡에서 자라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걸까 싶었다. 밸런타인데이나 생일이나 기념일에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위안을 얻으려고 꼭 푸들처럼 단정하게 다듬어 유리 꽃병에 눌러 담아야 하는 걸까 싶었다. 꽃다발을 보면 수지는 길모퉁이 문방구에서 파는 홀마크 카드가 생각났다. 가격이 미리 찍혀 있고 오래 전부터 용도가 정해진 카드. 꽃이 제구실을 한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 장례식장에서 보았을 때뿐이었다. (49)

 

  리버사이드파크 벤치에서 첫 데이트를 했을 때 데미안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게서 대답을 찾지 마. 그래 봐야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지지는 않을 테니까.”
  수지는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62)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은 도피였다. 두 사람의 사랑이 격렬했던 이유는 흥분 때문이 아니라 거세게 밀려드는 슬픔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끝에서 외톨이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77)

: 다시 읽는다면 여긴 종이를 펼친 채 뒤돌아보지 않을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한밤중에 일어나 담배를 찾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하지만 세상이 까마득한 새벽 4시에는 구원을 청할 데가 없다. (…) [마이클]도 외로움을 느낄지, 외로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110)
: 최근에 담배 한 갑을 사긴 했지만 나는 거기에서 딱 한 개피만 꺼내 불을 붙여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담배에 대해 얘기하는 수지의 말투에는 왠지 낯익은 구석이 있다. 그보다도 새벽 4시에 대한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매일같이 새벽 4시를 살아내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없는데 잠은 오지 않는 그런 시간, 연락할 곳도 할 수 있는 곳도 없고 어디에도 기댈 수 없을 것만 같은 진공 같은 어둠. 왜 잠들어야 하는지, 그 의미마저 흐릿해진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는 새벽 4시는 정말로 까마득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새벽 4시의 이야기는-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얼어붙은 듯이 앉아서 이 시간이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라디에이터 소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열차의 엔진 소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똑똑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곳에서 오 년을 지내는 동안 어느덧 익숙해진 라디에이터 소리는 겨울밤이면 그녀의 마음을 달래준다. 쉭쉭대는 소음이야말로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신호, 집과 가장 잘 어울리는 평화다. 집 안으로 천천히 온기가 퍼지고 수지는 그녀가 탐하는 게 마이클인지, 몸으로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인지, 양손으로 팔을 감고 안아주는 포옹인지, 그녀의 목을 간질이는 숨결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녀는 자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 속 깊숙이 들어와 집요하게 흔들며 그녀의 모든 기억을 지워 주는 사람의 품에 안겨 곯아떨어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마이클은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다. 아침이면 그는 항상 회의장으로, 공항으로, 가족 곁으로 서둘러 달려 나간다. 아주 가끔은 그녀 옆에 누울 때도 있지만 최후의 통첩처럼 입을 맞추고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두 사람은 잔잔한 애정이 흐르는 사이가 아니다. 서로에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다. 마이클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그녀가 오히려 떠나 버릴 것이다. 그녀는 마이클 옆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꼭 잡아 주던 다른 남자의 손을 떠올린다. 눈은 감고 있는지, 입술은 좀 전에 환희를 느꼈을 때처럼 웃고 있는지, 손가락은 아쉽다는 듯 그를 붙잡고 있는지, 몇 번씩이나 떠나려 해도, 죽어 가는 담배를 들고 외로이 앉아 다른 남자의 기억을 떨쳐 버리려는 듯 마이클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새벽 4시의 이 아파트만큼이나 멀리 달아나려 해도 놓아주지 않을 사람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지, 일어나고 또 일어나 확인할 때까지 편히 쉬기에 알맞은 각도와 자리를 찾았는지 확인하려는 듯 그녀를 절대 놓지 않았던 다른 남자의 손을 떠올린다.
  새벽 4시는 기억 속의 시각이다. (118)

 

 정적은 모든 것을 감추어 준다. 라디에이터는 쉭쉭대는 소리를 멈추었다. 완벽하게 고요한 밤이다. 조금 있으면 동이 틀 것이다. 시커먼 하늘 위로 벌써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다. 내일이 벌써 다가오고 있다. 귀를 찢는 듯한 전화벨 소리가, 필사적으로 울리는 네 번의 벨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쩌면 그녀가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를 맞으며 바다와 동행하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탐하는, 어둠 속에 누운 채로 살아 있는 척하는 그녀 말고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시각이니까. (122)

: -여기까지.


그녀가 욕망이라는 단어의 뜻을 깨달은 것은 그의 몸을 자신의 몸만큼이나 잘 알게 된 뒤였다. (…) 유혹한 쪽은 분명 수지였지만 침묵으로 부추긴 쪽은 데미안이었다. 그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웃어 넘기거나 불쑥 입을 열어 그녀의 작전을 교란시키는 법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134)

 

[케일럽과] 마주앉은 수지는 이 아파트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깨닫는다. 그녀와 함께 앉아 주고 그녀의 목소리와 숨결과 부엌을 돌아다니는 조용한 발걸음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 그녀의 아파트에 손님이 찾아오기는 참 오랜만의 일이다. 그녀는 혼자 지내는 데 거의 완벽하게 익숙해졌다. (160)
: 이 부분을 옮겨 적다 보니, 왜 이젠 옛날에 접어놓은 글귀들이 내게 와닿지 않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새로 줄을 그은 이유도.

 

수지는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케일럽이 안쓰럽다. (167)

 

  두 사람은 학창 시절에 커피 중독자나 다름없었다. 3학년 때는 헝가리 페이스트리 전문점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18세기 소설 과목의 리포트를 썼다. 수지와 젠은 둘 다 전공이 문학이었다. 그 당시였다면 무카페인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카페인이 진정한 영혼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그렇게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다. 세월이 흘러서일 것이다. 둘이 함께 나이를 먹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253)
: 왜 이 부분에 줄을 그었는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또렷하게 기억하겠지. 그리고 언제든 이 글귀를 볼 때면, 마지막줄의 그녀처럼 느낄 수 있기를.

 

  그녀는 보리차를 좋아한다고 덧붙이려다 보리차를 마지막으로 마신 지 몇 년이 지났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엄마는 보리차를 끓여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물 대신 내놓곤 했다. 하지만 보리차는 물과 맛이 전혀 달랐다. 색깔은 밝은 갈색이었다. 그리고 가을에 거둔 옥수수 냄새가 났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보리차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원피스, 날마다 바르던 장밋빛 립스틱, 없이는 못 사는 줄 알았던 보리차를 기억 저편에 묻고 지내다가 어느 날, 집과는 멀리 떨어진 황량하고 텅 빈 아파트에서 그녀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 “물을 마시겠소, 보리차를 마시겠소?”라고 하는 말을 들은 뒤에야 갑자기 오랫동안 보리차를 마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다니.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한때는 없으면 안 되는 줄 알았던 물건이 사라진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니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데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 그보다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랑은 책임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381)

: 나처럼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자주 부딪치게 되는 놀라움이다. 내가 그냥 기억력이 나쁜 걸까, 대단히 멍한 사람인 걸까, 아니면 지독히도 자기 중심적이라 지금 당장의 나 말고는 아무 것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곤 한다.

 

수지는 드디어 누군가 그레이스의 행방을 걱정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 빈자리처럼 슬픈 것은 없다. (416)

 

수지는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시절, 케일럽이 항상 입고 다녔던 하늘 빛 볼링 재킷을 떠올린다. 재킷의 오른쪽 주머니에는 ‘빈센트’라는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그런데 수지는 예전 남자 친구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한 사람을 알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하지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감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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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2008)

창비 2012 


엄마를 부탁해

저자
신경숙 지음
출판사
창비 | 2008-11-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여자로서 엄마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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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어쩌고 하는 책은 그냥 읽기 싫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광고를 해댈 때 보지 않았는데, 우연히 읽기 시작해서는 결국 사서 후딱 다 읽어버렸다.

 

그들은 너의 엄마로 추정되는 한 늙은 여인이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 걸, 간혹 주저앉아 있는 걸, 에스컬레이터 앞에 하염없이 서 있는 걸 보았다고 했다. 너의 엄마인 듯한 한 늙은 여인이 오래 역에 앉아 있다가 도착하는 지하철을 타는 걸 봤다는 이도 있었다. 너의 엄마가 어디론가 사라진 그 밤에 너는 일행들과 밤택시를 타고 북경의 휘황한 먹자거리에서 나가 붉은 불빛 아래서 오십육도쯤 되는 중국술을 맛보며 붉은 기름에 볶은 뜨거운 게요리를 먹고 있었던 거다. (19)
: 앞에서부터 주욱 이어지는 이 단호한 흐름이 마음에 들어서 체크해놨던 부분.

 

엄마에게 너란 존재가 딸이 아니라 손님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은 엄마가 네 앞에서 집을 치울 때였다. (26)
: 얼마 전 부산집에 갔을 때, 나는 부산스럽게 뒷정리를 해대는 나를 멀찍이서 지켜보며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생각했다. 혼자 지내는 서울집이 이보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이젠 집구석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어서일까? 이 추측은 반쯤만 맞는 것 같았다. 그보다도, 나는 가족 앞에 철저하게 손님으로 있었다. 언제나 식탁을 공유하는 이들과 달리 나는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나의 특별한 방문을 알리고 싶어 안달했다. 나 여기 왔어요 생색을 내며 먹지 않는 밥상에 앉아 평소에는 먹지 않을 네 번째 다섯 번째 끼니를 주워먹고,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뒷정리를 했다. 마치 누군가의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았을 때처럼. 네가 이제 나이를 먹어 엄마와 말이 통하니까 참 좋구나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하지만 난 이 대화가 이 공간이 불편해요, 하는 생각을 품었다. 물론 이 묘한 거리감 또한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나는 뒷정리를 하면서 내가 있을 곳을 만들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불편하게, 불편하게. 집을 떠나 어딘가에 묵을 때면 꼭 필요한 얼마간의 적응 시간이 있다. 나만의 동선을 만드는 그 적응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결국은 그곳에 기어이 섞여 들어가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손이 닿아야 비로소 참아줄 만해지는 그 공간,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메워진 우물 위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작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엄마! 하고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막 기울기 시작한 가을볕이 서향집 마당에 가득 차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살폈지만 거실에도 방에도 엄마는 없었다. 집 안은 어수선했다. 식탁 위 물병 뚜껑은 열려 있고 물컵은 개수대에 놓여 있었다. 거실 바닥에 깔린 돗자리엔 걸레바구니가 엎어져 있고 소파엔 아버지가 벗어놓은 듯 때묻은 셔츠가 팔을 벌리고 걸려 있었다. 서향집인 탓에 사위어가는 중인데도 강한 빛이 빈 공간에 스며 있었다. 엄마! 텅 비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엄마! 하고 한번 더 불러보았다. (28)
: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없지, 하는 마음으로 불러보는 큰딸과는 다르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언제라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텅 빈 집을 향해 엄마! 하고 부른 적이 왕왕 있었다. 대체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차피 분명 매번 조금씩 달랐겠지만. 답이 돌아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당연한 일에 매번 실망했을 리는 없다. 때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아 안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 내 방구석이 텅 비어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 비어있는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얘기가 재미있었다구? 너는 마음이 짠해졌다. 너의 얘기가 재미있는 게 아니라 점자도서관에 다녀오기 전과 후의 네가 엄마에게 얘기하는 방식이 달랐음을 깨달았다. 도시로 나온 뒤의 너는 어땠는가. 너는 엄마에게 늘 화를 내듯 말했다. 엄마가 뭘 아느냐고 대들듯이 말했다. 엄마가 돼서 왜 그래? 책망하듯이 말했다. 엄마가 알아서 뭐 할 건데? 무시하듯 말했다. 엄마가 너를 혼낼 힘이 없어진 걸 안 뒤의 너는, 엄마가 거긴 왜 갔느냐고 물으면 일이 있어서요, 짤막하게 대답했다. 다른 나라에서 책이 번역되었을 때나 혹은 세미나가 있어서 비행기를 타게 됐을 때도 거기 왜 가느냐? 고 물으면 그냥 일이 있어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엄마는 비행기 좀 그만 타라고 했다. 사고가 나면 이백명씩 죽는다는데 그걸 왜 타느냐고. 일이 있어서 타는 거예요 하면 너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 게냐? 고 물었다. 그러네, 엄마, 너는 시무룩하게 대꾸하면 그만이었다. 너는 엄마에게 너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네가 하는 일이 엄마의 삶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이 여겨졌다. 그런데 엄마는 점자를 보고 네가 느낀 막막함과 사백여명이나 되는 앞 못 보는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을 때의 낭패스러움에 대해 얘기하자 남아 있던 두통을 씻어낸 듯이 귀기울여 듣는 것이었다. (45)
: 나는 때로 엄마의 전화를 피했다. 이유는 없었다. 다만 받지 않으면 안 될 이유도 없었다. 누구나 느껴본 적 있을 그런 류의 죄책감에, 이 부분에서 잠시 멈추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변할 생각이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았을 수많은 이들 중 누군가는, 변했을까?

 

  – 예전엔 안 그랬는데 너는 냉정한 사람이 되었구나. 어미가 그리 전화를 끊었으면 뭐라고 다시 전화를 해야 옳지 그리 뻗댈 수가 있냐?
  뻗댄 건 아니었다. 그 일을 그리 오래 생각하고 있을 만큼 너는 한가하지 않았다. 문득 노여워하며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엄마가 떠올라 전화를 해봐야지, 생각했다가도 또다른 일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뒤로 밀리곤 했다. (62)

 

  – 이게 뭐냐?
  – 지난 12월 31일에 새해를 맞이하며 글 쓰는 거만 빼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재미로 적어본 거야. 앞으로 십년 동안은 꾸준히 해야 할 것들이거나 하고 싶은 것들. 근데 내 어떤 계획에도 엄마와 무엇을 함께 하겠다는 건 없더라. 쓸 때는 몰랐어. 엄마 잃어버리고 나서 다시 보니 그렇더라구.
  여동생의 눈이 물기로 반짝였다. (132)

 

니 고모가 딸내미 저리 두다간 빨갱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어도 나는 니가 하는 말과 너의 행동을 자유롭게 두었고나. 오빠들에겐 그러지 못했어. 타이르고 야단쳤고나. 네 작은 오빠가 전경이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허리를 다쳤을 때 소금을 달궈 허리에 얹어주다가 계속 이런 식이면 엄마가 죽어버리겠다고 위협까지 했고나. 그러면서도 네 오빠가 무식한 엄마라고 생각할까봐 가슴 졸이기도 했재. 젊으니까 젊은 대로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이었을 텐데 나는 힘껏 가로막았재. 너한테는 안 그랬다. 니가 변화시켜놓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어도 널 막지는 않았어. (218)

 

  내가 가끔 당신에게 책에서 읽었다며 해준 이야기들은 내가 읽어서 해준 이야기들이 아니요이. 사실은 내 딸한테 물어서 해준 것들이오. 스페인인가 하는 나라에는 산티아고라는 곳이 있다 했던 거. 당신은 그 이름을 외우는 것도 힘들어해서 거기 어디라고 했소? 자꾸 물었소이. 거기에 순례자의 길이 있는데 삼십삼일 동안 걸어가는 길이라 합디다. 내 딸아인 거길 가고 싶어했소이. 가끔 내게 그곳 얘기를 해주곤 했는데 마치 그곳을 내가 가고 싶은 것처럼 당신에게 말한 적도 있었네. 그랬더니 당신이 그랬지라오. 그리 가고 싶으면 언젠가 함께 가보자고 말이오. 어딘가를 함께 가보자고 하는 말을 당신에게서 듣고 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소이. 내가 당신을 다시 찾아가지 않은 게 그날 이후부턴가보오. 사실은 나는 그곳이 어딘 줄도 모르고 가고 싶지도 않으요. 지나간 시간에 함께한 일들은 어찌 되는 건지 당신은 알고 있소이?
  당신한테 묻고 싶은 말을 내 딸애한테 물었더니 내 딸은 엄마가 그런 말을 하니 너무 이상해, 하면서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거 아닐까, 엄마! 합디다. 무슨 말이 그리 어려운지. 당신은 알아 듣겠소? 이젠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모두 여기에 스며들어 있다는데, 느끼지 못할 뿐 옛날 일은 지금 일과 지금 일은 앞의 일과 또 거꾸로 앞의 일은 옛날 일과 다 섞여 있다는데 이제 이어갈 수 없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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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  2013. 1. 23. 00:00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1890)

이선주 옮김

황금가지 2004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저자
오스카 와일드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3-10-0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는 오스카 와일드의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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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를 취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포즈일 뿐이고, 내가 알기론 그것이 가장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포즈일세.” (16, 헨리)

 

어쩌면 그리스 시대의 이상보다 더 아름답고 풍요한 무엇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우리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조차도 자기 자신을 두려워해. 손발이 잘린 야수가 자기 부정의 형태로 비극적 부활을 하며 우리의 삶을 훼손하고 있어. 우리는 우리가 했던 거부 때문에 처벌받고 있는 거야. 우리가 교살하려고 했던 충동은 살아남아 우리의 정신 속에서 새끼를 치고 독을 퍼뜨린다네. 육체는 한 번 죄를 지을 뿐, 그 죄는 사라지지. 왜냐하면 행동은 정화의 한 형태니까. 남는 것은 쾌락의 기억, 또는 회한이라는 사치뿐이야. 유혹을 사라지게 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유혹에 지는 것. 저항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것이 스스로에게 금지한 것들을 향한 갈망으로 병들 것이며, 영혼의 괴물 같은 법칙이 끔찍하고 불법적이라고 규정한 것들을 향한 욕망으로 병들 거야. (35, 헨리)

 

“영혼은 관능으로만 치유될 수 있으니까. 관능이 영혼으로만 치유될 수 있는 것처럼.” (38, 헨리)

 

한 주제에 대해 말하면서 그 주제를 모두 소진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그는 청중이 지쳐 나가떨어지게 하는 사람이었다. (63, 토머스 버든 경에 대해)

 

“젊은 시절에 저지른 큰 실수 중에 기억하는 것이 있나요, 공작부인?” (...) “그렇다면 그 실수들을 다시 저지르세요.” 그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젊음을 다시 찾고 싶다면, 젊었을 때의 바보짓들을 다시 저지르기만 하면 됩니다.” (...) “그것이 인생의 위대한 비밀 중 하나예요.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비굴한 상식 때문에 죽어 가고, 우리가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실수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한참 늦은 다음이지요.” (66-7, 헨리)

 

“친구여, 삶에서 한 번만 사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천박한 사람들일세. 그들이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변치 않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 나는 그것을 관습의 권태 또는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부르겠어. 감정적인 삶에서 변치 않는 마음은 말하자면 지적인 삶에서의 일관성 같은 것일세. 단순히 실패의 고백일 뿐인 것이지.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언젠가 그걸 치밀히 분석해야 할 것이야. (...)” (78, 헨리)

 

헨리 경이 웃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여기길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두렵기 때문일세. 낙천주의의 근거는 절절한 공포감이야.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관대하다고 믿는 건,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미덕을 소유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야. 잔액보다 큰 액수를 인출할지도 모를 때 우리는 은행 직원을 칭찬하고, 혹시 나는 털지 않겠지 하는 희망에 노상강도에게서도 좋은 면을 찾아낸다네. 내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네. 나는 낙천주의를 그 이상 경멸할 수 없어. 파멸한 인생이라면, 성장이 멈춘 삶만큼 파멸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 본성을 훼손하고 싶다면, 그 모양을 바꾸기만 하면 되네. (...)” (114, 헨리)

 

우리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감정에는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무엇인가가 있는 법이다. (133, 시빌 베인을 향한 그레이의 반응)

 

자기를 책망하는 회한에는 일종의 사치스러운 쾌락이 있다. 자신을 비난할 때, 우리는 다른 그 누구에게도 우리를 비난할 권리가 없다고 느낀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는 것은 신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죄의 고백 자체이다.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도리언은 자신이 용서받았다고 느꼈다. (144)

 

그림 속 얼굴에는 극도의 구토와 혐오감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가 보고 있는 얼굴은 다름 아닌 도리언 그레이의 얼굴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도리언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추악하게 훼손하고 있는 그것은 아직 도리언을 완전히 삼키지 않은 상태였다. 듬성듬성한 머리칼이지만 아직 거기엔 도리언의 금발 고수머리가 남아 있었고 육감적인 입술 위에는 아직 진홍빛이 남아 있었다. 푹 꺼지고 우둔하게 변해 버린 눈이었지만 눈동자엔 아직 원래의 푸른빛이 가졌던 사랑스러움이 남아 있었고 깎은 듯 한 콧방울과 유연한 목에 귀족적인 윤곽이 아직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 그림 속 인물은 여전히 도리언이었다. 하지만 누가 이런 짓을 했나? (224, 도리언의 초상을 본 바질의 반응; emphasis added)

 

다른 사람의 실수와 착오를 대신 짊어지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 인간에겐 각자 살아야 하는 자기의 삶이 있고,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대가 역시 각자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 가엾은 것은, 한 번의 잘못 때문에 여러 번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뿐. 진실로 우리는 거듭 대가를 치르고 또 치른다. 인간과 거래하면서 운명의 여신은 결코 장부를 덮지 않는다. (271, 할렘가 같은 곳에서 나오면서 싱글턴의 망가진 삶을 보고 진정 자기 때문인지 고민하는 도리언) -> 마치 한 번의 선택으로 읽히는 것은 지금의 나의 처지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요? 로맨스는 반복에 의해 살고, 반복은 단순한 취향을 예술로 승화시킵니다. 게다가 사랑을 할 때마다 그 사랑은 유일무이한 사랑이지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사랑입니다. 대상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정열의 유일성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유일성이 더욱 극대화될 뿐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기껏해야 한 번의 위대한 경험을 할 수밖에 없고, 이 경험을 가능한 자주 다시 해 보는 데에 인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282) -아 진짜 궤변인데 말 잘한다.

 

그녀는 다시 웃었다. 그녀의 치아는 붉디붉은 과일에 박힌 새하얀 씨앗 같았다. (295, 헨리 누이를 향한. 좋은 표현)

 

“그렇다고 확신하나, 도리언?”

“그래요.”

“하! 그렇다면 그건 환상일세. 사람이 전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 중에 진실로 옳은 것은 없네. 그것이 ‘믿음’이란 것의 숙명이고 ‘로맨스’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일세. (...)” (307, 헨리)

 

늙은 사람의 비극은 늙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실은 늙었음에도 여전히 젊다는 데에 있어. 때로 나는 나의 무구한 솔직함에 스스로 놀랄 때가 있네. (308, 헨리)

 

“이보게, 자네 진정 이제 설교를 하려 드는군. 좀 있으면 개종한 사람의 열정을 가지고 신앙 부흥을 외치며 돌아다니겠어. 이제 자네에겐 지겨워진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짓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말이야. (...) 예술은 인간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 예술은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파괴할 뿐이야. 아름다운 불모성, 그게 예술의 특징이야. (...)” (311, 헨리)

 

그가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죄악이 그때그때 확실하고 신속한 벌을 내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처벌은 정화를 가능케 했다. 가장 공정한 신에게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가 아니라 ‘우리 죄인을 벌하시고’가 되어야 했다. (313, 영원히 늙지 않기를 기도한 것을 후회하며, 도리언)

 

젊음이란 게 기껏해야 무엇이던가? 파르께하니 설익은 시간, 얕은 감정과 병적인 생각의 시간이다. 그는 왜 청춘의 제복을 걸치려 했던 것일까? 청춘은 다만 그를 망가뜨렸을 뿐이다. (314, 도리언의 후회)

 

허영심이라고? 호기심이라고? 위선이라고? 개심하겠다는 그의 결심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나?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있었다. 최소한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누가 알랴......? 아니다. 저 세가지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없었다. 허영심 때문에 그는 그녀를 타락의 길로 끌고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위선으로 그는 선행의 가면을 썼다. 호기심으로 자기 부정을 시험해 본 것이다. 그는 이제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317, 도리언이 헤티 머튼을 생각하며)

 

초상은 그에게 양심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그의 양심이었다. 그 양심을 이제 그는 파괴할 작정이었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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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1942)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5)

 


그리스인 조르바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2-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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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하지 않으시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들지 않았어요?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나는 당시 육신의 쾌락은 업신여기고 있었다. 가능하면, 먹어도 부끄러운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먹어치웠다. (54)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저런 이기주의!」

내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어요, 두목, 사실이 그러니까. 내가 콩을 먹으면 콩을 말해요. 내가 조르바니까 조르바같이 말하는 거요.」 (86-87)

 

「왜 웃지 않소? 왜 그런 눈으로 보고 계시오? 나라는 놈은 원래가 이렇게 생겨 먹었어요. 내 속에는 소리치는 악마가 한 마리 있어서 나는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감정이 목구멍까지 올라올 때면 이놈이 소리칩니다. <춤춰!> 그러면 나는 춤을 춥니다. 그러면 숨통이 좀 뚫리지요. 칼키디체에서 우리 꼬마 디미트라키가 죽었을 땝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조금 전처럼 춤을 추었지요. 친척과 친구들이 시체 앞에서 춤추는 나를 말렸어요. <조르바가 돌아 버렸다! 조르바가 미쳐 버렸다.> 그 사람들이 웅성거리더군요. 하지만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정말 미치고 말았을 겁니다. 너무 슬퍼서죠. 그게 내 첫아들인데다, 세 살 때 죽어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었지요. 두목, 이제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지요? 젠장, 아니라면 내가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건가?」 (115)

 

공자 가라사대,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던가. 지당한 말씀! (142)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이 되기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에 설명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 나는 허망한 기분으로 지난 일을 생각했다. 허공 중에서 바람을 받은 한 조각 구름처럼 내 인생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갔다.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이고, 모였다가는 다시 모습을 바꾸어, 차례로 백조가 되고, 개가 되고, 악마가 되고, 전갈이 되고, 원숭이가 되었다. 구름이란 영원히 흩날리고 찢기는 존재…… 구름은 하늘의 바람과 무지개에 쫓겨다니는 존재가 아닌가. (188)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무 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서 몸을 뒤척이며 내가 갈 길을 일러준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190)

 

나는 머리 위로 손을 뻗치고 서가에서 좋아서 갖고 다니던 책 한 권을 뽑아 내었다. 말라르메의 시집이었다. 천천히 마음 내키는 대로 읽었다. 읽다가 책을 닫았다가 다시 펼쳤다. 그러다 나는 결국 그 책을 놓고 말았다. 그의 시는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경험한 느낌이었다. 그의 시가 창백한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로 보였던 것이다. 박테리아 한 마리 없는 완벽한 증류수였지만 영양분 역시 하나 없는 물 같은 것, 요컨대 생명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창조의 섬광을 상실한 종교에서 제신은 결국 인간의 고독과 벽면을 치장하는 시적 모티프나 예배 용품으로 전락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지와 씨앗을 품은 심장의 열화 같은 호흡이 완벽한 지적 놀음, 교묘하면서도 덧없는 구조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209)

 

사면을 내려가면서 조르바가 돌멩이를 걷어차자 돌멩이는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조르바는 그런 놀라운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에서 가벼운 놀라움을 읽을 수 있었다.

「두목, 봤어요?」

「……」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212)

 

윗주머니에 넣은 또 한 통의 편지가 피부로 느껴져 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이 달콤한, 뜸들이기는 그것으로 넉넉했다. (218)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344)

 

「……우리가 꼭 비둘기 한 쌍처럼, 여기 죽치고 앉아 어쩌자는 겁니까. 가서 춥시다. 먹어 치운 양에게 미안하지도 않소? 그럭저럭 방귀로 빠지게 할 셈이오? 갑시다, 가요. 가서 방귀가 아닌 노래나 춤이 되게 합시다. 조르바는 다시 태어났도다!」(362)

 

내 존재의 심연에서 전날 밤에 느낀 즐거움이 솟아올라 필경은 흙으로 빚어졌을 내 육체라는 대지에 물을 대어 주는 것 같았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노라면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눈을 뜨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어 있고 긴 여행으로 지치고 물려받은 짐에 짓눌려 있기는 하나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368)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 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얼마 후 그는 말을 계속했다.

「……부불리나가 살아 있을 동안 말입니다. 어느 카나바로도 나(뼈다귀에 가죽을 입힌 이 조르바 말입니다)만큼 그 여자를 기쁘게 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이 세상의 모든 카나바로는 그 여자에게 키스하면서도 자기 함대나, 왕이나, 크레타나, 훈장이나, 마누라나…… 이런 걸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걸 깡그리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늙은것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후략)」(420-421)

 

(이 사람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해야 한다. 잘 보아 두어야지, 절대로 절대로 다시는 조르바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아야지!)

나는 그의 가슴에 뛰어들어 울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웃어서 내 감정을 숨기고 싶었으나 그렇게도 안 되었다. 목구멍에 응어리가 걸려 있었다.

나는 먹이를 채는 새처럼 목을 뽑고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만났다가는 헤어지면서도 우리의 눈은 하릴없이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 모습, 몸매와 몸짓을 기억하려고 하니…… 부질없어라, 몇 년만 흘러도 그 눈이 검었던지 푸르렀던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을.) (460-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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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산문집 (2005-2008)
전은경 옮김
푸른숲 2009

나는시간이아주많은어른이되고싶었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피터 빅셀 (푸른숲, 2009년)
상세보기

  비틀즈 CD를 사서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을 (새로이) 집어들게 되었다. 이 책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한 곡이 있어 링크한다.

The Beatles - Nowhere Man


  어쩌라고! 읽다보면 어쩌라고 싶을 때가 있다. 때로는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현대사회(는 좀 거창한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간에 '지금 현재')를 비꼬지만 그러면서도 신기하게도 그의 태도 자체는 별로 과하지 않다.  아주 특별한 이야기 아주 대단한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인데 그 성실한 관찰(본인은 아니랬지만)과 재치있는 언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기다림을 기다리며
  기다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기다리기를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열심히 기다릴까?
  아마 기다림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스물한 밤만 더 자면 오는 생일 기다리기, 크리스마스 기다리기, 그리고 드디어 12월 24일 당일이 되면, 이제 선물을 뜯어도 된다는 허락을 기다리는 그 긴 시간. 유치원 입학 기다리기, 학교 입학 기다리기, 잉크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 기다리기, 열두 살이 되기를, 열여섯 살, 열여덟 살, 스무 살이 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 그리고 마침내 아흔다섯 살이 되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기다림. (15쪽)

  우리는 왜 기다리는 걸까? 왜 기차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복도에 서서 기다릴까? 아마 우리가 기다림만큼 고통스럽게 배운 건 없기 때문일 테지. 유치원과 학교 입학 기다리기, 졸업 기다리기, 은퇴 기다리기, 그리고 어쩌면 기다림조차 기다리기. 병원에 약간 일찍 도착해서 그 앞을 오가며 기다리기, 이 기다림이 끝나면 대기실에서 또 기다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의 기다림을 기다리기. (18쪽)

  기다림으로 채워도 좋을 시간을 너무도 빽빽하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많이 부여받았기 때문에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나는 국민학생 언니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럼 도시락을 싸가서 친구들과 노나먹을 수 있을 것이라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초등학교 급식세대가 되었으므로 그런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사실에 많이 서운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기다림만이 회자될 뿐이다. 나는 여섯살 때부터 월간 만화잡지를 읽었다. 소녀만화 잡지 중에 '밍크'는 간간이 보는 정도였고 '나나'를 애독했는데 지금은 폐간되고 없다. 나는 매 월 다음 달이 오기를 기다려 '나나'를 샀다. 여덟살 때 반여동으로 이사 온 다음에는 도서대여점이라는 신세계를 만나 동네 책방 주인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으며 단행본들을 섭렵했는데 그때도 매일같이 신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책방에 언제쯤 새책이 들어오는지를 꿰고 있을 뿐더러 아주머니께서 날 위해 책을 빼 놔 줄 수도 있는 뭐 그런 단골 손님이었다. 일곱살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보다 어릴 때는 엄마 아빠의 안경을 동경하여 안경을 쓸 날을 기다렸다.
  지난 학기 사진 수업을 하면서 Anna를 모델로 포토스토리 촬영을 했다. 그때 알게 된 재밌는 (국적 불명의) 크리스마스 풍습이 생각났다. 일단 영국에서 축하하는 건 확실하니 영국에서는, 으로 문장을 시작해도 괜찮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Advent Calender라고 부르는 초콜릿 든 장난감(?)을 판다고 한다. Anna가 Waitrose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엄청나게 쌓아놓는데 금방 동이 나 버린다고. 간단히 말하면 12월 달력이 찍혀 있는 초콜릿 통인데 달력에 찍힌 날이 되면 그 칸을 열어서 안에 있는 초콜릿을 먹는 것이다. Anna도 집에서 보내준 걸 들고서 12월이 다가오니 이제 이걸 시작할 수 있다며 마구 들떠 있었다. 영국에서 보낸 건데 그걸 먹으려고 며칠씩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일찍부터 이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나보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니 며칠 앞으로 다가온 발렌타인 데이 생각이 난다. 스케줄러에 발렌타인데이 하트뿅뿅 이런 거 표시해놓을 생각이 전혀 안 드는 올해의 발렌타인 데이. 그날이 발렌타인 데이인지 어떤지도 모르고 미리 풀코스 데이트 약속을 잡아놓았으니 초콜릿을 사긴 할테지만 참 기다려지지는 않는다. (데이트는 기다려진다. 그나저나 내가 진짜로 선물하고 싶은 건 Pedro Javier Gonzalez의 비틀즈 노래 기타연주 음반인데 눈에 보이는 음반점마다 확인해봐도 모조리 장기품절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2010년 화이트데이에 B가 준 '손수 만든 초콜릿' 선물 상자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적당한 크기 무난한 색상의 정사각형 통이어서 약상자로 유용하게 쓰고 있다. 그때 받은 초콜릿은 고맙다며 기쁘다며 다 먹긴 했지만 참으로 뜨악스러웠다. 정말 미안하다. 그걸 만들고 있었을 정성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지만 나는 애인에게 손수 만든 초콜릿을 선물하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친구한테 받는 것은 또 괜찮다. 모르겠다 인간이 왜 이리 꼬였는지. 어쨌거나, 내게도 기다려지는 몇번의 발렌타인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발렌타인 데이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때 정사각형 선물 상자를 썼었더랬는데.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하늘색 정사각형 상자에 복슬복슬한 포장재를 채우고 개별포장된 동그란 초콜릿들을 넣었던 것 같다. 발렌타인 데이까지 포장을 고민하며 기다리고, 또 당일에는 그 초콜릿을 건네줄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루종일 기다린 끝에 집에 갈 때가 되어서야 초콜릿을 그 아이가 입고 있던 외투 주머니에 넣어 주었는데 멋들어진 말 한마디 못 했던 것 같다. 그 후 몇번의 (대충 세어본 결과 적어도 대여섯번) 발렌타인 데이들을 기다려본 것 같은데 제일 처음이랍시고 이것만 이렇게 강렬하다니 다른 날들이 섭하겠다.

우리가 아직 기다릴 수 있던 시절에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목적지가 정해져 있으면 기차에서 글을 쓰기가 불가능해진다. 이때의 기차는 나에게도 조바심치는 장소가 되고, 기다림 자체가 힘겨워진다. 내가 무엇을 기다리는지—예를 들면 베를린—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는지 —17시 24분, 베를린 도착—상당히 정확하게 예고되는데도, 아니 사실은 그래서 더 끔찍하다. 예고는 기다림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예고는 기다림을 방해하니까.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42쪽)

  글쎄, 하지만 우리가 글을 쓰지 않고 조바심내는 그 순간이 사실은 더 '기다림을 기다리는' 상태에 근접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책을 읽으며 지하철을 타고 한 바퀴 돈다고 한들, 그 지하철의 풍경을 볼 수는 없을테니까. 공간이 아니라 나의 일로 시간이 귀속되면 그건 더 이상 기다림이 아니기도 하다. 알고서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태도가 문제일 뿐. 그러고보면 정시 출발 정시 도착 같은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이지젯은 참으로 순수한 기다림을 내게 안겨주었다.



오늘은 일요일
  일요일의 산책. 그렇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들 때문에 일요일에 산책을 하는 게 아닌지 늘 의심스러웠다. 교양 있는 가족은 산책을 하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요일의 산책.
  그렇다, 나는 산책을 가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 의복을 사지 않고, 예전에 입던 일요일 정장을 평일에 입어 닳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의례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더 이상 의례를 치르지 않게 되자 나는 해방됐다고 느꼈다. 이제 자유를 누리긴 하는데, 일요일은 더 이상 일요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왠지 모르게 일주일 내내 일요일을 기다린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는 일요일을 기대하며 장을 본다.
  그러고는 스튜 앞에 앉아, 평일에 먹는 구운 소시지를 갈망한다. 구운 소시지가 외로움을 덜어주리라고 상상하며. (22쪽)

  어제의 해도 오늘의 해도 쭉 그냥 해일 뿐인데 무슨 호들갑을 떨며 1월 1일이라는 이유로 일출을 보러나가냐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야 그 생각이 진심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일출을 보러 나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해가 그 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1월 1일의 해가 특별한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해를 보러 몰려나가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가? 나는 이제 그런 의례가 아주 반갑다. 단지 그 존재 만으로. 몇번이고 읽으면서 애써 분석해낼 필요가 없는, 강렬한 일상의 상징이다.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의례'
진짜 열정에는 반복이 필수적인데 지금은 최신 시사성만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최신 시사성은 기존의 시사성을 영원히 대체한다. (50쪽)
아니다, 나는 영화나 재즈를 향한 열정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의례를 잃었다. 열정이 깊이 간직되어 있는 의례를……. (52쪽)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
  고향은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언제나 냄새를, 특히 양배추와 파 또는 탄 음식과 같은 부엌 냄새를 품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도 사라졌다. 우리는 이제 뢰스티(스위스식 감자전)가 갈색이 되면 안 되고, 가장자리가 검게 타면 더더욱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타지 않고 노릇노릇하게만 구운 뢰스티도 아마 좋을 테고 어쩌면 더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은 더 이상 뢰스티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억나게 하지 않는다면 품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26쪽)

  맛이나 냄새같은 감각이 기억을 완성하는 일은 흔하고, 그런 기억은 다른 기억들보다 농도 짙게 느껴진다.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고 나서 컵라면을 먹지 않으면 그건 놀이의 완성이 아니라고, 가게가 도로가에 있더라도 친구랑 학원 쉬는 시간에 떡볶이니 꼬지니 하는 걸 호호 불며 사먹지 않으면 무슨 재미냐고, 건강에 도움될 것 하나 없는 불량식품이라도 하굣길에 꾀돌이 아폴로 맥주사탕을 쥐고 오지 않으면 얼마나 아쉬우냐고. 반쯤은 결벽증이 되어가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쁜 짓을 하는 것의 기쁨.



과거가 없는 자그마한 술집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과거를 소유하는 일은 이렇게도 일찍 시작된다!
과거, 그러니까 옛날이 지금보다 나은 이유는 지금보다 뭔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것. 여기에는 모든 것이 지금과 아주 달랐을 때 자기도 그걸 경험헀다는 기억도 포함된다. (29쪽)

  이 부분을 읽을 때 W가 해줬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났다. W네가 새집으로 이사를 갔을 때, 집을 착각해서 옆동인지 아무튼 다른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잠시 둘러보고 집 구조(와 크기)가 예정된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어른들이 제대로 된 집을 찾아갔을 때 어린 W는 진짜 자기 집을 보며 여기 우리집 아냐 우리집은 훨씬 넓단 말이야 하며 펑펑 울었단다. 어린 아이는 잘못 찾아들어간 집을 순식간에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아이는 그 집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그 집의 기억을 소유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집에서 오래 살았을 진짜 집주인도 그런 기억은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추억은 언제까지나 내 것이고,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과 그 소중한 '내 것'을 나누고 싶어한다.

선불 버스표와 선술집
음식은 맛있었다. 그녀가 요리를 조금 못했다고 하더라도——그런데 요리를 못했으리라는 상상은 되지 않는다——사람들은 아마 린다에게 갔을 것이다. 린다는 사실 주인이 아니라 음식점 그 자체였다. 미식 평론가들의 '가격 대비 만족'이라는 궁색한 평가가 맞지 않는 음식점. 그녀가 곧 음식점이었다. 바로 이 점이 '손님이 왕'이 아닌 그곳의 큰 매력이었다. 그녀는 여왕이었다. 권력은 그녀과 쥐고 있었고, 호의도 그녀가 베풀었다. 그녀에게 오는 사람들은 여왕을 알현하는 것이었고, 여왕의 손님이 됐다는 감격적인 느낌을 즐겼다. 이런 우아함에 비하면 "손님은 왕이다"라는 진부한 문구는 얼마나 초라한가.
  왕이 되어 신하들을 찾아가는 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아마 무척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 자신이 위인인 사람들, 자기 의견을 지녔으며 이를 뚜렷하게 밝히는 사람들, 자기 기분과 고집을 지닌 사람들을 방문하는 게 더 좋다. 나는 술집에서 손님일 뿐 아니라 방문객도 되고 싶다. (36쪽)



편안하고 질서 있는 무질서
  아니, 나는 무질서 속에서도 편안하지 않다. 내 뮐서는 제화공 해프리거의 무질서와 같지 않다. 내일이나 모레 또는 주말에 다시 한 번 청소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혹시 평생 잘못된 것을 추구한 건 아닐까? 정리하는 데 늘 실패한 게 아니라, 무질서를 만드는 데 실패한 게 아닐까? (58쪽)

  재미있는 접근이로세. 내가 늘 강조하는 바를 적어두고 가야겠다. 책상 위가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책상 청소를 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편안하고 질서 있는 무질서다.



'이해하기'보다 '듣기'
그들[지적장애인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이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곳에서 청중에게 이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듣기'란 '이해하기'보다 훨씬 단계가 높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대단찮은 청중일 것이다. 언제나 성급하게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 (103쪽)

  읽기는 듣기의 형태 가운데 하나다. 그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약간 교육을 더 받고 조금 더 숙달된 지금은 읽으면서 성급하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순진무구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장 파울을 읽으며, '이해하기'를 거부하려고 약간 노력한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다. 귀 기울여 듣기에는 관용이 필요하고 선입견이 없어야 하는데, 이른바 경험이라는 게 많아질수록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 (105쪽)
:다른 이의 경험을 섣불리 나의 것으로 치환하지 않기.



작은, 아주 작은 소속감
나는 이 년 동안 그에게 인사했지만, 그는 인사에 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 둘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고, 우리는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때ㅜ터 그는 싹싹하게 인사한다. 그가 자기 손을 가슴에 얹고 몸을 약간 굽히며 인사를 하면 나는 항상 기분이 좋다. 예전에 그가 인사에 대답하지 않을 때, 나는 거의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이제 드디어 같은 버스를 타는 셈이다. 나는 사실 그를 모른다. 그의 이름도, 그가 간직한 이야기들도. 그도 나를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그는 이제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127쪽)

  흔들리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옆자리 사람에게 스르륵 기댈 때가 있다. 누군가 내게 기대어 올 때도 있다. 그 고단한 머리를 쳐내지 않는 것은 그 사람과 내가 함께 이곳에 있었던 우연을 소중히 여기는 최소한의 행위 (또는 비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하긴 개콘 '불편한 진실'에서는 미모 출중한 자가 기대어오면 어깨를 들이대고 반대의 경우 머리를 튕겨 낸다고 하긴 하더라마는...



단어가 없어도 나눌 수 있는 대화
  "그 여자[발리 여자]에게 어떻게 그런 고통을 줄 수 있어요? 흥정을 했어야죠. 그 책은 그녀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돈이 필요해서 자기 소유물과 헤어져야 한 거예요. 그 여자에게는 작별을 끌고 늦출 권리가 있었다고요. 그렇게 빨리 흥정을 끝내다니, 당신은 그녀를 모욕한 거예요."
  그녀가 요구했던 가격보다 더 주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꽤 훌륭한 줄 알았다. 흥정이 가격뿐 아니라 생동감, 교제 및 대화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스위스 사람인 내가 어찌 알았으랴. 그때부터 나는 되도록 길게 흥정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원래 가격보다 더 주었다. (163쪽)

  요즘 외국인들과의 융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외국인들이 이제 좀 우리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언어를 배워서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누가 시간을 내서 그들과 친근하게 이야기한단 말인가? 현금 인출기와 차표 자동 발매기가? 어쩄든 융화란 이런 것과는 다르다. 우리 언어를 잘하며너도 융화를 동경하는 외국인들도 많고, 융화를 원하는 내국인들도 점점 많아진다. 융화는 외국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만을 목표로 삼는 사회의 문제다. 효율은 결국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 되므로.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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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  2012. 2. 12. 17:57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74)
박찬기 옮김
민음사 2010

젊은베르테르의슬픔(세계문학전집25)
카테고리 소설 > 소설문고/시리즈
지은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민음사, 1999년)
상세보기

베르테르는 한때 S의 닉네임이었다. 젊은 베르테르가 마지막에 자살을 했다는 것쯤이야 워낙 유명하니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무슨 내용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얼마나 그를 좋아했던지 굳이 책을 사서 읽어보려고 했으나 별로 재밌지가 않아서 안 읽고 있다가,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읽게 되었다.

대문호 괴테와 이 책을 밤새워 읽었을 수많은 청춘들(울엄마 포함)에게는 죄송하지만 정말 재미 없었다. 게다가 읽을 때 자꾸 그가 떠올라서 진저리를 치며 읽었다. 그냥 닉네임이 그랬기 때문에 떠오른 게 아니라 정확히는 자꾸 '겹쳐졌다.' 읽고나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심정이 되어 독문학과 후배한테 대체 이 작품이 뭐가 대단하냐고 묻기까지 했다. 근데 걔 답변이 매우 마음에 들었으므로 하이라이트를 여기 옮겨놓는다. "[...]주변에 그런놈 있으면 피하는게 답이거든요[...]" 아하.



  어린아이들이란 스스로 무엇인가 원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원하는지를 모른다고 한다. [...] 그러나 어른들도 어린애들과 마찬가지로, 이 지상을 저처없이 비틀거리고 돌아다니며, 자기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 채, 이렇다 할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과자나 흰자작나무 회초리에게 지배당하는 실정이다. (21쪽)

나도 그런 젊은이라면 어떤 영주에게나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추천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애인으로서의 그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만일 그가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도 마지막이지. 아아, 나의 벗들이여, 무엇 때문에, 천재의 물결이 둑을 뚫고 터져나와 큰 홍수를 이루며 콸콸 쏟아져 내려와서, 그대들의 영혼을 뒤흔들어놓는 일이 이렇게도 드물단 말인가! (26쪽)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로테의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꼴을 하는지, 그것을 자네에게도 한번 보여주고 싶다! 더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로테가 마음에 드느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 난 그 마음에 든다는 말이 죽도록 싫다. 로테를 좋아하면서 모든 감각과 감정이 그녀로 가득 차고 넘쳐흐르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마음에 든다구! (61쪽)

  나를 사랑한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후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얼마나——자네는 그것을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이니까, 이런 말을 해도 상관없겠지——나는 얼마나 스스로를 존경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64쪽)
: 사랑하기 이전에도 '나'는 있어야 한다.

  나는 벌써 로테의 초상화를 세 번이나 시작해 보았지만, 다 실패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도 제법 일이 잘되어 나갔던 만큼, 더욱 울화가 치솟는다. 그래서 나는 로테의 실루엣을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68쪽)
: 초상화로 완전히 옮길 수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는 게 당연하다.

이 세상에서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소위 양자택일의 방식으로 처리되는 일은 아주 드물다. 매부리코와 납작코 사이에도 수많은 단계가 있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에도 가지가지 음영이 있는 법이다. (73쪽)

「아아, 당신들 이성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란!」 하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격정! 주정! 미치광이! 당신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태연자약하게 시치미를 떼고 서 있으니, 정말 도덕군자라고 해야 되겠군요! 술주정뱅이를 나무라고 욕하며, 미친놈을 업신여기고 싫어하며, 마치 제사장처럼 그 옆을 지나가고, 자기를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주지 않는 것을 바리새 사람처럼 신에게 감사하지요. 나는 술에 취해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어요. 내 격정은 항상 미치광이에 가까웠지요.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 모두 후회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옛부터 사람들은, 어떤 위대한 일이나 불가능한 일을 해낸 비범한 인물을 술주정뱅이나 미치광이라고 부르지 않고는 못 배겼던 사실을, 나는 나름대로 이해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도 어떤 사람이 자유스럽고 고상하고 훌륭한 일, 예상을 뒤엎는 거창한 사업에 착수하는 경우에는 거의 예외없이, 그 사업이 진행되는 도중인데도 그 사람을 <저 친구는 술에 취했어, 저 작자는 천치란 말야> 등 비난하기가 일쑤니, 정말 참을 수가 없단 말이오! 올바른 정신을 가진 냉철한 당신네들은 창피한 줄 알아야 돼요! 당신네들은 참으로 똑똑하고 현명하지만 염치를 좀 알란 말이오!」(79쪽)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변할 수 없는 것일까? (85쪽)
: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뿌리가 같다.

불행한 일이다! 빌헬름! 나의 활동력은 방향을 바꾸어 불안한 게으름으로 변하고 말았다. 멍청하니 하릴없이 지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내게는 공상도 없어졌고 자연을 감상하는 정서도 사라졌으니, 이제 책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일어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89쪽)

확실히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와, 그리고 우리를 모든 것과 비교해 보도록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행불행은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대상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독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문학의 환상적인 이미지에 영향받은 우리의 상상력에는 본질적으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충동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피조물을 한층 고양시킨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이게 되어 우리 이외의 것은 모두 우리보다 훌륭하고 누구 할 것 없이 우리보다는 완전해 보인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여러가지 있다고 우리는 느낀다. 그런데 우리에게 부족한 바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그 사람에게 주어버리고,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이상적인 삶의 즐거움마저도 부여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행복한 사람이 한 명 완성되는 것인데, 이처럼 완벽하게 이룩된 사람이란 사실은 우리 스스로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104쪽)

더구나 내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일은 공작이란 분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은 데 지나지 않는 일을 곧잘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한테 들은 그대로 그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그분은 그뿐 아니라, 내 마음보다는 내 지성과 재능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내 마음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이며, 오직 그것만이 모든 것의 원천, 즉 모든 힘과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아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 (129쪽)
: 그 마음이란 걸 어떻게 채워갈 것인지. 감동도 연마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불안하게 하고 한없이 괴롭히는 일을, 꾹 참고 가슴속에 간직해 두지 않는 것일까? 왜 자네에게까지 걱정을 끼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항상 나를 불쌍히 여기고 책망할 수 있는 기회를 자네에게 주는 것일까? 좋다, 이것도 아마 내 운명에 속하는 것일 테지! (134쪽)
: 이야기해봤자 크게 소용없는 건 맞다. 하지만 이건 니 잘난 운명이고 뭐고 그런 거라기보단 그냥 친구를 잘 둔 거야. (하는 식으로 무지 삐딱하게 책을 한 권 읽으면 아주 피곤해진다. 사실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도 있는데, 꼭 너무 나가주시니 이런 식으로 답할 수밖에 없어진다...)

  즉, 이런 사랑, 이런 성실, 이런 정열은 결코 문학적인 창작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가 교양이 없다든가 야만적이라고 부르는 계급의 사람들 속에서, 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살아있다. 그런데 우리들 소위 교양 있는 사람이란…… 아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신적 불구자가 아닐까? (137쪽)
: 트리스트럼 섄디가 떠오르는 대목.

  나는 이렇게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만다. 나는 이렇게도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146쪽)
: 심정이 이해 안 되는 바는 아니나 이렇게 살지 마시라고요.

「베르테르 씨, 당신은 우리와 만나실 수 있고 또 만나주셔야만 해요. 다만 그 정도를 적당히 해주시라는 거예요. 아아, 어째서 당신은 무엇이든 한번 손댄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그 정열과 격렬한 성격을 지니고 태어나신 건가요! 제발 부탁이에요」(175쪽)

  이처럼 깊은 생각에 잠기는 동안, 그녀는 또렷하게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베르테르를 자기 곁에 머무르게 하고 싶은 것이 자기 마음속의 은근한 소원임을 지금 처음으로 깊이 느꼈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녀는 그를 자기 곁에 붙잡아두는 일이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고 또 허용될 수도 없음을 스스로에게 타일렀습니다.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늘 쾌활하고 거리낌없었던 그녀가 이제는 행복에 대한 희망을 잃고 우수와 비애에 짓눌려서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가슴은 무겁게 조여들었으며 먹구름의 기운이 그녀의 눈 위에 어른거렸습니다. (182쪽)
: 로테에게 거의 200프로 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 상황을 봤을 땐 그저 신경증 환자에게 굴복해 우울의 늪에 빠져드는 한 불쌍한 여자로 보인다.



  물론 베르테르가 그저 미친놈이기만 한 건 아니다. 놀라울 정도로 그 옛날 A와 만날 때 그리고 헤어졌을 때의 심정을 잘 묘사하는 대목들을 몇번이나 마주쳤고, 격렬하고 과감한 감정 표현들은 충분히 매료될 만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 눈에 베르테르는 그저 미치광이 똘추 찐따(...)일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다, 언젠가 썸머처럼 운명을 믿는 로맨티스트로 변모한 내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전혀 다르게 읽힐지도. 근데 아마 내가 그 운명의 남자 집에 가서 그를 재워준 뒤 (늘 그래줘야만 하는 토끼, 아니 유리같은 남자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긴 하지만 사람이 늘 강인할 수만은 없다는 점은 인정하니까) 그의 책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도저히 읽을 책이라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밖에 없는지라 맥주 한 캔을 곁들여 책을 읽기 시작하지 않는 한, 다시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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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  2012. 1. 29. 02:56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1987)
유우정 옮김
문학사상사 2001

상실의시대:원제노르웨이의숲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2010년)
상세보기

서른일곱 살의 와타나베는 함부르크 행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듣고 심한 두통을 느낀다. 그리고 18년 전에 나오코와 걷던 초원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 초원의 깊은 우물. 이야기로만 들은 우물의 모습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오코와의 기억은 잊혀져간다. 


  아주 오래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지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상세한 지도가, 선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24쪽)



  그런 소리[플라타너스 낙엽 밟는 마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나오코가 불쌍해 보였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따스함인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데서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55쪽)

  사실 소설의 맥락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S가 사랑한다는 그 사람이 내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너는 '그 누군가'를, 바로 '너의 사랑'을 사랑하고 있고 나는 그냥 내팽개쳐져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팔이라도 잡고 있었더라면.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바람맞고 기숙사로 돌아와 나가사와 선배를 만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야."
  "선배님은 내가 지금껏 만난 분 중에 가장 색다른 분이에요."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술값을 전부 치렀다. (99쪽)



  "부자의 최대 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모르겠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가령 내가 반 친구한테 뭘 좀 하자고 하면 상대는 이렇게 말한단 말이야. '나 지금 돈이 없어서 안 돼'라고. 그런데 내가 그런 입장이 된다면, 절대 그런 소리를 못 하게 돼. 내가 가령 지금 돈이 없어 그런다면,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 비참할 뿐이지. [...]" (108쪽)



  "나 말야, 널 좀더 알고 싶어."
  "그저 보통 사람이야. 보통 가정에서 태어나 보통으로 자랐고, 보통 얼굴을 하고 있는데다 성적도 보통이고, 극히 보통의 일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만, 자기를 보통 사람이라고 하는 인간을 믿어선 안 된다는 글을 쓴 사람이,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아니었나? 나 그 책, 자기한테 빌려 읽었잖아."
  나오코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180쪽)



왜 나오코가 기즈키와 자지 않았는지에 대해 대답하던 중 나오코는 발작을 일으킨다. 그녀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레이코와 산책을 하고 돌아온 와타나베에게, 나오코는 다시 기즈키를 회상하며 말하기 시작한다. 

  "늘 자신이 달라지도록, 나아지도록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 되면 짜증을 내거나 슬퍼했어. 몹시도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해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바꿔 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 생각해 보면 가엾어, 그 사람." (203쪽)

  얼마전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어색함 속에 밥을 먹고는 결국 체하고 말았다. 적게는 2년에서 많게는 4년 만에 처음 만나는 친구들. 처음에는 그들과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한 줄 알았다. 서로가 변했네 변하지 않았네 재어보는 탓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말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괴리가 더 어색했다. 노래를 잘 하는 나(나보고 뭐 바이브레이션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되는 거라고 했대나 어쨌대나), 그림을 잘 그리는 나, 뭐든지 잘 할 것 같은 나, 일본어를 잘 하는 나... 내가 아는 나는 노래도 보통 그림도 보통 뭐든지 보통에 일본어는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 괴리 속에 기분이 붕 뜨면서도 여전히 참담한 기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너 그때랑 달라 참 많이 변했어 지금 너는 참 우아해졌구나."
  힘이 쪽 빠져버린 목소리, 자그마해진 몸뚱아리가 그런 인상을 자아내는 것 같은데 마치 너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래? 하는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참 일관성있게도 나를 못나게, 그리고 가엾게 여기고 있다.



  "한 번 더 물어 보겠는데, 왜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하고 있어?"
  "아마 세상에 아직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쩐지 이곳이 현실 세계가 아닌 것처럼 여겨져. 사람들도, 풍경도, 어쩐지 현실 세계같이 안 보인단 말이야."
  그녀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로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짐 모리슨의 노래에 분명히 그런 게 있었어."
  "People are strange when you are a stranger."
  "피스" 하고 그녀가 말했다.
  "피스" 하고 나도 따라했다. (266쪽) 

The Doors - People Are Strange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하고 나가사와 선배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해." (314쪽)

나가사와 선배의 취직을 축하하는 저녁 자리. 미드나이트 블루빛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하쓰미와 나가사와가 언쟁을 시작한다. 나가사와는 애인이 있는데도, 마치 게임을 즐기듯 여러 여자와 자고, 와타나베도 그 덕(?)에 여자와 잠자리를 한 일이 있다. 

  "나와 와타나ㅔ는 닮은 데가 있어" 하고 나가사와 선배가 말했다.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신에게만 흥미를 느끼는 인간이야. 오만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야.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밖에는 흥미를 못 가져. 그러니까 자기와 타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있지. 내가 와타나베를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점이야. 다만 와타나베의 경우는 스스로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헤매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 거야." (322쪽)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미도리를 만난 와타나베. 미도리의 집에서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준 다음의 장면.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그 책을 내리 읽었다. 처음으로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그리고 8년 후, 나는 여자의 집 부엌에서 한밤중에, 그것도 여자친구의 죽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사이즈가 작은 파자마를 입은 채 같은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뭔가 참 기묘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만일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내가 《수레바퀴 밑에서》를 다시 읽는 일이란 없었을 것이다. (356쪽)

  상황 묘사도 그렇지만 상황 자체가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미도리와 어떤 의미로든 자지 않은 와타나베가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나오코의 편지] 나도 되도록 시간을 내서 편지를 쓰려고 애는 쓰지만, 편지지를 마주하기만 하면 마음이 곧 가라앉고 말아. 이 편지도 지금 온갖 힘을 다해 쓰고 있는 거야.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고 레이코 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오해하지는 말아 줘. 난 네게 말하고 싶은 일,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글이 되질 않아. 그래서 나는 편지 쓰기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아. (359쪽)

  나의 게으름 때문에도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지만, 이 부분이 내게 강하게 불러오는 기억이 있다. S는 내게 매일 메일을 썼다. 그리고 그 와중에 편지도 썼다. 그러면서도 내게 더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그가 (나 말고) 사랑에 미쳐 있었던 게 틀림없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답장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어제의 답장을 하고 싶으면 어느새 오늘이 와 있었고 내가 답해야 할 이야기는 배로 불어났다. 또 내일이 오고, 모레가 와서 끝없이 쌓였다. 물론 그에 대한 즉각적인 답변은 매 순간 한 상태였으므로 꼭 '답장'이 아니어도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얼마만큼 생각하고 있는지를 적자. 그래서 나는 가방 속에 편지지와 주소를 쓴 봉투를 줄곧 넣어 다니며 편지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편지지를 펼치고 앉으면 막막함의 벽이 나를 가로막는다는 데 있었다. 과제의 첫 줄을 적어야 하는 순간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더 슬프고 괴롭고 훨씬 더 외로웠다. 어떻게 말을 돌리고 돌려보려 해도 쓰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을 웃으며 끝마쳤다 해도 하지 못한 첨언이 남아 있었다. 하트가 박혀 있는, 내 취향이 아닌 편지지 위에 한 줄 한 줄 쥐어짜낸 편지를 다 완성한 다음에 찢어버리기도 했다. 쓰지 못한 문장이 이미 너무 많았음에도.

내가 쓰고 싶은 말은 "나는 네 덕분에, 행복하지 않다" 였다. 

 말하고 싶은 일,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말들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네 덕분에, 행복하지 않았으므로.



레이코의 기타 연주 한 곡에 성냥개비 한 개를 놓으며, 포도주향과 담배 연기를 곁들여 그들은 나오코의 장례식을 다시 치른다. 쉰 곡을 다 연주한 다음, 그들은 네 번의 관계를 가진다. 다음날 아사히가와로 가는 레이코를 배웅하며, 와타나베는 편지할 것을 약속한다.

  "편지는 그저 종이일 뿐인 걸요"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 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지요." (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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