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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수키 김 (2004)

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2005

 


통역사

저자
수키 김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5-10-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국어 통역사로 일하는 수지 박이 부모님 살해에 관련된 미스터리...
가격비교

 

집에서 책 정리를 하다가 책등이 분홍빛으로 바랜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잡았다. 언제 처음 읽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일 것이다, 신간으로 나온 걸 사 읽었던 것 같으니까. 책 곳곳에 접어놓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가 접어놓은 페이지를 꼼꼼히 읽어보면 꼭 아, 이 부분 때문이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곳이 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종이를 펴기만 할 뿐 어떠한 표시도 남기지 않는다. 대신 이번에 줄을 그은 곳은 이런 부분들.

 

  데미안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뉴욕 사람들은 바쁜 게 아니야. 자기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을 뿐이지.” (32)

 

보기에 예쁘기는 하지만 원래 있던 곳, 그러니까 네덜란드의 만년 들판이나 노스캘리포니아의 비탈진 계곡에서 자라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걸까 싶었다. 밸런타인데이나 생일이나 기념일에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위안을 얻으려고 꼭 푸들처럼 단정하게 다듬어 유리 꽃병에 눌러 담아야 하는 걸까 싶었다. 꽃다발을 보면 수지는 길모퉁이 문방구에서 파는 홀마크 카드가 생각났다. 가격이 미리 찍혀 있고 오래 전부터 용도가 정해진 카드. 꽃이 제구실을 한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 장례식장에서 보았을 때뿐이었다. (49)

 

  리버사이드파크 벤치에서 첫 데이트를 했을 때 데미안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게서 대답을 찾지 마. 그래 봐야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지지는 않을 테니까.”
  수지는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62)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은 도피였다. 두 사람의 사랑이 격렬했던 이유는 흥분 때문이 아니라 거세게 밀려드는 슬픔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의 끝에서 외톨이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77)

: 다시 읽는다면 여긴 종이를 펼친 채 뒤돌아보지 않을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한밤중에 일어나 담배를 찾는 것은 나쁜 습관이다. 하지만 세상이 까마득한 새벽 4시에는 구원을 청할 데가 없다. (…) [마이클]도 외로움을 느낄지, 외로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110)
: 최근에 담배 한 갑을 사긴 했지만 나는 거기에서 딱 한 개피만 꺼내 불을 붙여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담배에 대해 얘기하는 수지의 말투에는 왠지 낯익은 구석이 있다. 그보다도 새벽 4시에 대한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매일같이 새벽 4시를 살아내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없는데 잠은 오지 않는 그런 시간, 연락할 곳도 할 수 있는 곳도 없고 어디에도 기댈 수 없을 것만 같은 진공 같은 어둠. 왜 잠들어야 하는지, 그 의미마저 흐릿해진 상태로 멍하니 앉아 있는 새벽 4시는 정말로 까마득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새벽 4시의 이야기는-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얼어붙은 듯이 앉아서 이 시간이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라디에이터 소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열차의 엔진 소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똑똑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곳에서 오 년을 지내는 동안 어느덧 익숙해진 라디에이터 소리는 겨울밤이면 그녀의 마음을 달래준다. 쉭쉭대는 소음이야말로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신호, 집과 가장 잘 어울리는 평화다. 집 안으로 천천히 온기가 퍼지고 수지는 그녀가 탐하는 게 마이클인지, 몸으로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인지, 양손으로 팔을 감고 안아주는 포옹인지, 그녀의 목을 간질이는 숨결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녀는 자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몸 속 깊숙이 들어와 집요하게 흔들며 그녀의 모든 기억을 지워 주는 사람의 품에 안겨 곯아떨어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마이클은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다. 아침이면 그는 항상 회의장으로, 공항으로, 가족 곁으로 서둘러 달려 나간다. 아주 가끔은 그녀 옆에 누울 때도 있지만 최후의 통첩처럼 입을 맞추고 벽을 향해 돌아눕는다. 두 사람은 잔잔한 애정이 흐르는 사이가 아니다. 서로에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다. 마이클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그녀가 오히려 떠나 버릴 것이다. 그녀는 마이클 옆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꼭 잡아 주던 다른 남자의 손을 떠올린다. 눈은 감고 있는지, 입술은 좀 전에 환희를 느꼈을 때처럼 웃고 있는지, 손가락은 아쉽다는 듯 그를 붙잡고 있는지, 몇 번씩이나 떠나려 해도, 죽어 가는 담배를 들고 외로이 앉아 다른 남자의 기억을 떨쳐 버리려는 듯 마이클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새벽 4시의 이 아파트만큼이나 멀리 달아나려 해도 놓아주지 않을 사람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지, 일어나고 또 일어나 확인할 때까지 편히 쉬기에 알맞은 각도와 자리를 찾았는지 확인하려는 듯 그녀를 절대 놓지 않았던 다른 남자의 손을 떠올린다.
  새벽 4시는 기억 속의 시각이다. (118)

 

 정적은 모든 것을 감추어 준다. 라디에이터는 쉭쉭대는 소리를 멈추었다. 완벽하게 고요한 밤이다. 조금 있으면 동이 틀 것이다. 시커먼 하늘 위로 벌써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다. 내일이 벌써 다가오고 있다. 귀를 찢는 듯한 전화벨 소리가, 필사적으로 울리는 네 번의 벨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쩌면 그녀가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를 맞으며 바다와 동행하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탐하는, 어둠 속에 누운 채로 살아 있는 척하는 그녀 말고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시각이니까. (122)

: -여기까지.


그녀가 욕망이라는 단어의 뜻을 깨달은 것은 그의 몸을 자신의 몸만큼이나 잘 알게 된 뒤였다. (…) 유혹한 쪽은 분명 수지였지만 침묵으로 부추긴 쪽은 데미안이었다. 그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웃어 넘기거나 불쑥 입을 열어 그녀의 작전을 교란시키는 법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134)

 

[케일럽과] 마주앉은 수지는 이 아파트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깨닫는다. 그녀와 함께 앉아 주고 그녀의 목소리와 숨결과 부엌을 돌아다니는 조용한 발걸음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 그녀의 아파트에 손님이 찾아오기는 참 오랜만의 일이다. 그녀는 혼자 지내는 데 거의 완벽하게 익숙해졌다. (160)
: 이 부분을 옮겨 적다 보니, 왜 이젠 옛날에 접어놓은 글귀들이 내게 와닿지 않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새로 줄을 그은 이유도.

 

수지는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케일럽이 안쓰럽다. (167)

 

  두 사람은 학창 시절에 커피 중독자나 다름없었다. 3학년 때는 헝가리 페이스트리 전문점의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18세기 소설 과목의 리포트를 썼다. 수지와 젠은 둘 다 전공이 문학이었다. 그 당시였다면 무카페인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카페인이 진정한 영혼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그렇게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다. 세월이 흘러서일 것이다. 둘이 함께 나이를 먹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253)
: 왜 이 부분에 줄을 그었는지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또렷하게 기억하겠지. 그리고 언제든 이 글귀를 볼 때면, 마지막줄의 그녀처럼 느낄 수 있기를.

 

  그녀는 보리차를 좋아한다고 덧붙이려다 보리차를 마지막으로 마신 지 몇 년이 지났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엄마는 보리차를 끓여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물 대신 내놓곤 했다. 하지만 보리차는 물과 맛이 전혀 달랐다. 색깔은 밝은 갈색이었다. 그리고 가을에 거둔 옥수수 냄새가 났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보리차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원피스, 날마다 바르던 장밋빛 립스틱, 없이는 못 사는 줄 알았던 보리차를 기억 저편에 묻고 지내다가 어느 날, 집과는 멀리 떨어진 황량하고 텅 빈 아파트에서 그녀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 “물을 마시겠소, 보리차를 마시겠소?”라고 하는 말을 들은 뒤에야 갑자기 오랫동안 보리차를 마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다니.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한때는 없으면 안 되는 줄 알았던 물건이 사라진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니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데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 그보다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랑은 책임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381)

: 나처럼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자주 부딪치게 되는 놀라움이다. 내가 그냥 기억력이 나쁜 걸까, 대단히 멍한 사람인 걸까, 아니면 지독히도 자기 중심적이라 지금 당장의 나 말고는 아무 것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살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곤 한다.

 

수지는 드디어 누군가 그레이스의 행방을 걱정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 빈자리처럼 슬픈 것은 없다. (416)

 

수지는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시절, 케일럽이 항상 입고 다녔던 하늘 빛 볼링 재킷을 떠올린다. 재킷의 오른쪽 주머니에는 ‘빈센트’라는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그런데 수지는 예전 남자 친구의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한 사람을 알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하지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감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안심이 된다.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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