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시대 - 해당되는 글 1건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1987)
유우정 옮김
문학사상사 2001

상실의시대:원제노르웨이의숲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2010년)
상세보기

서른일곱 살의 와타나베는 함부르크 행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듣고 심한 두통을 느낀다. 그리고 18년 전에 나오코와 걷던 초원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 초원의 깊은 우물. 이야기로만 들은 우물의 모습을, 그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오코와의 기억은 잊혀져간다. 


  아주 오래전, 내가 아직 젊고 그 기억이 훨씬 선명했던 무렵, 나는 그녀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그땐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첫 한 줄만 나와 준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든 술술 써지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아무리 애써도 나와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상세한 지도가, 선명함이 지나쳐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24쪽)



  그런 소리[플라타너스 낙엽 밟는 마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나오코가 불쌍해 보였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팔인 것이다.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나의 따스함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따스함인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데서 나는 어쩐지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55쪽)

  사실 소설의 맥락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S가 사랑한다는 그 사람이 내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너는 '그 누군가'를, 바로 '너의 사랑'을 사랑하고 있고 나는 그냥 내팽개쳐져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팔이라도 잡고 있었더라면.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바람맞고 기숙사로 돌아와 나가사와 선배를 만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야."
  "선배님은 내가 지금껏 만난 분 중에 가장 색다른 분이에요."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술값을 전부 치렀다. (99쪽)



  "부자의 최대 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모르겠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가령 내가 반 친구한테 뭘 좀 하자고 하면 상대는 이렇게 말한단 말이야. '나 지금 돈이 없어서 안 돼'라고. 그런데 내가 그런 입장이 된다면, 절대 그런 소리를 못 하게 돼. 내가 가령 지금 돈이 없어 그런다면,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 비참할 뿐이지. [...]" (108쪽)



  "나 말야, 널 좀더 알고 싶어."
  "그저 보통 사람이야. 보통 가정에서 태어나 보통으로 자랐고, 보통 얼굴을 하고 있는데다 성적도 보통이고, 극히 보통의 일만 생각하고 있어."
  "그렇지만, 자기를 보통 사람이라고 하는 인간을 믿어선 안 된다는 글을 쓴 사람이,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아니었나? 나 그 책, 자기한테 빌려 읽었잖아."
  나오코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180쪽)



왜 나오코가 기즈키와 자지 않았는지에 대해 대답하던 중 나오코는 발작을 일으킨다. 그녀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레이코와 산책을 하고 돌아온 와타나베에게, 나오코는 다시 기즈키를 회상하며 말하기 시작한다. 

  "늘 자신이 달라지도록, 나아지도록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 되면 짜증을 내거나 슬퍼했어. 몹시도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지 못해서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바꿔 봐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어. 생각해 보면 가엾어, 그 사람." (203쪽)

  얼마전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어색함 속에 밥을 먹고는 결국 체하고 말았다. 적게는 2년에서 많게는 4년 만에 처음 만나는 친구들. 처음에는 그들과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한 줄 알았다. 서로가 변했네 변하지 않았네 재어보는 탓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말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괴리가 더 어색했다. 노래를 잘 하는 나(나보고 뭐 바이브레이션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되는 거라고 했대나 어쨌대나), 그림을 잘 그리는 나, 뭐든지 잘 할 것 같은 나, 일본어를 잘 하는 나... 내가 아는 나는 노래도 보통 그림도 보통 뭐든지 보통에 일본어는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 괴리 속에 기분이 붕 뜨면서도 여전히 참담한 기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너 그때랑 달라 참 많이 변했어 지금 너는 참 우아해졌구나."
  힘이 쪽 빠져버린 목소리, 자그마해진 몸뚱아리가 그런 인상을 자아내는 것 같은데 마치 너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왜 이래? 하는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참 일관성있게도 나를 못나게, 그리고 가엾게 여기고 있다.



  "한 번 더 물어 보겠는데, 왜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하고 있어?"
  "아마 세상에 아직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일 거야" 하고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어쩐지 이곳이 현실 세계가 아닌 것처럼 여겨져. 사람들도, 풍경도, 어쩐지 현실 세계같이 안 보인단 말이야."
  그녀는 테이블에 한쪽 팔꿈치로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짐 모리슨의 노래에 분명히 그런 게 있었어."
  "People are strange when you are a stranger."
  "피스" 하고 그녀가 말했다.
  "피스" 하고 나도 따라했다. (266쪽) 

The Doors - People Are Strange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단순한 노동일 뿐이야" 하고 나가사와 선배는 간단히 말했다. "내가 말하는 노력이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좀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해." (314쪽)

나가사와 선배의 취직을 축하하는 저녁 자리. 미드나이트 블루빛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하쓰미와 나가사와가 언쟁을 시작한다. 나가사와는 애인이 있는데도, 마치 게임을 즐기듯 여러 여자와 자고, 와타나베도 그 덕(?)에 여자와 잠자리를 한 일이 있다. 

  "나와 와타나ㅔ는 닮은 데가 있어" 하고 나가사와 선배가 말했다. "와타나베도 나처럼 본질적으로는 자신에게만 흥미를 느끼는 인간이야. 오만하다든가 그렇지 않다든가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야.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그런 것밖에는 흥미를 못 가져. 그러니까 자기와 타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있지. 내가 와타나베를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점이야. 다만 와타나베의 경우는 스스로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헤매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는 거야." (322쪽)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미도리를 만난 와타나베. 미도리의 집에서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준 다음의 장면.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그 책을 내리 읽었다. 처음으로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그리고 8년 후, 나는 여자의 집 부엌에서 한밤중에, 그것도 여자친구의 죽은 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사이즈가 작은 파자마를 입은 채 같은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뭔가 참 기묘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만일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내가 《수레바퀴 밑에서》를 다시 읽는 일이란 없었을 것이다. (356쪽)

  상황 묘사도 그렇지만 상황 자체가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미도리와 어떤 의미로든 자지 않은 와타나베가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나오코의 편지] 나도 되도록 시간을 내서 편지를 쓰려고 애는 쓰지만, 편지지를 마주하기만 하면 마음이 곧 가라앉고 말아. 이 편지도 지금 온갖 힘을 다해 쓰고 있는 거야.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고 레이코 언니에게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오해하지는 말아 줘. 난 네게 말하고 싶은 일,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글이 되질 않아. 그래서 나는 편지 쓰기가 여간 고통스럽지 않아. (359쪽)

  나의 게으름 때문에도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지만, 이 부분이 내게 강하게 불러오는 기억이 있다. S는 내게 매일 메일을 썼다. 그리고 그 와중에 편지도 썼다. 그러면서도 내게 더 표현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그가 (나 말고) 사랑에 미쳐 있었던 게 틀림없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답장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어제의 답장을 하고 싶으면 어느새 오늘이 와 있었고 내가 답해야 할 이야기는 배로 불어났다. 또 내일이 오고, 모레가 와서 끝없이 쌓였다. 물론 그에 대한 즉각적인 답변은 매 순간 한 상태였으므로 꼭 '답장'이 아니어도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얼마만큼 생각하고 있는지를 적자. 그래서 나는 가방 속에 편지지와 주소를 쓴 봉투를 줄곧 넣어 다니며 편지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편지지를 펼치고 앉으면 막막함의 벽이 나를 가로막는다는 데 있었다. 과제의 첫 줄을 적어야 하는 순간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더 슬프고 괴롭고 훨씬 더 외로웠다. 어떻게 말을 돌리고 돌려보려 해도 쓰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을 웃으며 끝마쳤다 해도 하지 못한 첨언이 남아 있었다. 하트가 박혀 있는, 내 취향이 아닌 편지지 위에 한 줄 한 줄 쥐어짜낸 편지를 다 완성한 다음에 찢어버리기도 했다. 쓰지 못한 문장이 이미 너무 많았음에도.

내가 쓰고 싶은 말은 "나는 네 덕분에, 행복하지 않다" 였다. 

 말하고 싶은 일,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말들이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네 덕분에, 행복하지 않았으므로.



레이코의 기타 연주 한 곡에 성냥개비 한 개를 놓으며, 포도주향과 담배 연기를 곁들여 그들은 나오코의 장례식을 다시 치른다. 쉰 곡을 다 연주한 다음, 그들은 네 번의 관계를 가진다. 다음날 아사히가와로 가는 레이코를 배웅하며, 와타나베는 편지할 것을 약속한다.

  "편지는 그저 종이일 뿐인 걸요" 하고 나는 말했다. "태워 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지요." (439쪽)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0) 2012.07.31
그리스 인 조르바  (0) 2012.07.31
애니 홀  (0) 2012.02.24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0) 2012.02.12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0) 2012.01.29
      기록  |  2012. 1. 29. 01:24



부움's Blog is powered by 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