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랜서로 나온 뒤로는 늘 퀘스트 깨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다. 1월에는 지난 2년 간 같이 일했던 컨설팅펌으로부터 처음으로 프리랜서로서 일을 받아 출장을 다녀왔다. 2월에는 그 컨설팅펌으로부터 첫 번역을 받았고, 첫 서울일을 했다. 4월에는 처음으로 다른 클라이언트의 순차통역일을 했다. 5월에는 처음으로 통역 부스에서 동기와 동시통역을 했고, 이것은 처음으로 에이전시를 통해 일을 해본 것이기도 했다. 첫 해외출장도 다녀왔고, 이것은 처음으로 후배와 일한 경험이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컨설팅펌 일에서 선배와 함께 일을 했다. 8월에는 처음으로 들어온 일을 거절했다. 9월에는 처음으로 컨설팅펌이 아닌 다른 클라이언트의 일로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10월에는 처음으로 직접 요율 협상을 했다. (그전까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을 받거나 제시하면 바로 수락이 되는 식이었다.) 세밀하게 보면 더 많은 처음이 있었다. 거의 매번 처음 접하는 분야, 처음 만나는 주제, 처음 만나는 기업 (혹은 심지어 처음 들어보는^^ 기업), 처음 만나는 동료, 처음 겪어보는 어려움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12월, 그래도 웬만한 처음은 다 겪은 것 같으니 이제는 그 위에 조금씩 경험을 덮어가며 익숙해지는 일만 남았나 했더니 어마어마하게 큰 처음이 왔다. 컨설팅펌 외의 일은 모두 동기들과 한 것이었는데, 처음으로 선배와, 그것도... 까마득한 대선배와 부스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처음 해보는 분야에서. 그리고 처음으로 통역사 세 명이 들어가는 세팅으로. (이 일을 제안받을 때 들은 정보 중에 클라이언트가 누구인지 말고는 하나도 맞는 내용이 없었다는 것을 적어둔다...^^) 아, 리허설도 처음 해봤지, 참. 리허설이 필요할 만큼 중대한 일도 처음이고. '처음'을 다루는 데 익숙해진 것 같다고? 그럼 어디 처음들을 똘똘 뭉쳐서 던질테니 받아봐! 라고 하는 것마냥, 뭉텅이가 날아왔다. 그것도 천 장짜리 자료랑 같이. 하하하. 

어제의 리허설은... 정말 힘들었다. 아니, 뭐, 그래도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거나 그런 류의 고통은 다행히 아니었지만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힘들었다. 도움을 계속 받으면서 내가 도울 일은 거의 없었다. 적확한 단어만이 서있을 자리에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두루뭉술하고, 듬성듬성하고, 뒤죽박죽이고, 때로는 치명적으로 틀렸다. 최선을 다해 통역을 하고 있지만 필요한 수준에 한참 못 미쳤다. 노력을 하면서도 결과는 게을렀다.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끝나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면서 뭐라고 뭐라고 지껄였다.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거기에 선배는 "좋은 통역사라면 이런 상황에서 투지가 생겨야죠"라고 담담하게 답을 해주었다. 작별인사를 하며 연신 사과의 말을 내뱉고 있던 내게 "I think you passed the test"라고 말해주고는 유유히 걸어가셨다. 대선배와의 첫경험. 정말 고통스러웠고 아마 앞으로 더 고통스러울 테지만 정말로 이번 퀘스트를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살아서 통과한다면 분명히 담력 하나는 제대로 길러질 거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 그저 하루 일한 것만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자료를 제본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나, 당일에 하드카피 몇 부를 출력해달라고 요청하는 것, 어떤 식으로 통역 자리를 세팅하는지("라이트"), 어떤 식으로 통역을 해야 하는지, 어떤 부분을 체크해야 하는지("비")... 실력이 최상이고, 모든 면에서 노련하고, 그러면서도 근면한 프로. 같이 부스에 들어가 앉아있는 것만으로 영광이었다. 단지 대선배라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 이런 걸 내가 지금 해야만 했을까? 이런 난이도의 일을 훌륭하게 해낼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것도 한 다스로. 나는 뱁샌데. 어느 모로 보나 이 일은 내 일이 아닌데, 어쩌다가 이게 나한테 와서는. 내심 기쁘고, 내심 기대되고, 내심 긴장되고 걱정되고 (그래서 밥도 못 먹고 소화도 안 되고 잠도 못 자고 온갖 난리는 다 피우고), 내심 우쭐하고, 내심 절망적인. 모든 퀘스트에 앞서 느꼈던 감정들이 잔뜩 증폭된 형태로 비처럼 내렸다. 나는 장대빗속에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있다. 

그러니까, 어제 리허설이 끝나고 받은 느낌은 비에 푹 젖어버린 느낌이었던 거다. 눈물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그건 슬퍼서도 분해서도 부끄러워서도 아니었다. 나를 적신 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빗방울마다 다른 감정, 느낌, 생각, 맥락이 녹아있었다. 나는 그 부스에 오기까지, 그리고 그 한나절 내내 부스 내에서 내린 비에 overwhelmed된 것이었다. 

오늘 설거지를 하면서 계속 왜 하필 내게, 왜 하필 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대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내게... 왔냐고 묻지 말라. 그건 분명히 이집트왕자였어. 설거지를 하다말고 허겁지겁 음악을 틀었다. 무슨 노래였는지 기억이 안 나서 Through Heaven's Eyes를 틀고 다시 설거지를 하는데 울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찾던 그 노래는 아니었지만 결국 생각은 맞닿아있었다. 그리고 몇 소절 더 듣자 기억이 났다. "When the gods send you a blessing, you don't ask why it was sent." 이집트왕자의 다른 노래에 나온 가사였던 거다. 마치 해독제를 찾은 듯이, 두 번 연속으로 이 노래를 들으며 찔찔 울면서 설거지를 마쳤다. 그리고 다시 몇 번이고 가사를 보고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엉엉 울었다.

버겁기는 하지만 이건 확실히 축복이다.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 왜 하필 내게 왔는지 물으면서 내 자신에게 재앙을 만들지 않겠다.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 퀘스트를 깰 때마다 게임처럼 어디서 축하의 팡파레라도 울리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는 점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어려운 퀘스트를 잘 뚫고 지나와도, 과거의 것에 비추어 현재의 것이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였는지 아무도 제대로 알고 싶어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며 알 수도 없다는 사실, 그걸 꾸준히 관찰해주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사실에.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타인에게 나의 퀘스트를 설명하고 가끔은 타인으로부터 박수를 받아야만 한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조율은 결국 내가 해야 한다. 마음의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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