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에서 돌아온 지 2주가 다 되어 간다. 2주 밖에 안 되었다니, 라고 생각할 만큼 파리 생활이 멀게 느껴진다. 그 2주 간은 고급 백수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고, 깨어 있는 동안에도 별달리 가치 있는 일은 하지 않은 채 청소에 매진하는 생활. 마치 이곳 공덕집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파리는 커녕 거제에도 간 적이 없고, 매일 종각으로 출근한 적도 없고, 안암에도 산 적이 없으며 부산에서 자란 적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이렇게 적고 보니 그건 어딘가 넋이 나가거나 뿌리를 잊어버린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파리 생활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쓰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르니, 생활을 유지하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 그 사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를 염려해주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Y와의 짧은 점심 만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Y는 내게 “감정을 셧다운 한 느낌”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을 쏟았다. 역시 만나는 사람에게 “잘 조율되어 있는” 그녀는 나 자신도 느끼지 못한 어떤 경직을 감지하고, 그걸 지적해 주었다. 그렇게 눈물을 쏟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내 목소리에 활기가 돌아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고 그녀도 지나가는 말로 이제야 좀 내가 나다워졌다고 했다. Y는 참으로 소중한 친구로구나.

*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끊기로 마음 먹었다. 아이폰 고장으로 스마트폰이 아예 없이 살았던 일주일의 상쾌함 때문이다. 눈을 뜨면 방에서 나가서 시계를 보기 전까지 몇 시인지 알지 못할 수 있고, 시계를 확인하고 처음으로 하는 일이 내가 잠든 사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는 것이 아닌 오렌지주스를 따르는 것인 생활. 스마트폰을 없애는 건 아무래도 여건 상 불가능하지만 몇 가지 제한은 둘 수 있다.
1) 고파스는 완전히 끊는다. 로그인도 하지 않는다. (라고 다짐해놓고 몇 번 들어갔다. 한 달 지나도 개선되지 않으면 아이디 없앨 예정.)
2) 인스타그램은 업로드 하지 않고, 앱 깔지 않는다. 일어나자마자 확인하는 빈도를 줄인다. 지금 성영태커피하우스에서 코스타리카를 마시고 있는데, 인스타에 올리고 지금 쓰고 있는 넋두리의 일부를 적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사진을 찍지 않고, 나의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인스타는 확실히 혼자 하는 모든 일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줬던 것 같다. 맛있는 걸 혼자 먹을 때, 좋은 영화를 혼자 볼 때, 내가 이런 걸 하고 있어요 여러분! 하고 올리고 라이크와 ​댓글을 받으면 완전히 혼자 한 건 아니게 되니까. 하지만 앞으로 혼자 한 일은 혼자 아는 것을 기본으로 하자. 정 알리고 싶은 소식이 있으면 페이스북으로, 적정한 길이의 글과 함께 알리자.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사진을 보는 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조금 지나면) 지금까지 업로드한 내용을 블로그 등으로 백업하고 순차적으로 사진을 지우자.
3) 유투브 앱은 레드 사용 기간이 끝나는 2/18 까지만 사용하고 해지 후 지운다. 킬링타임에 직빵이지만 인생에 거의 도움이 안 된다...
4) 알람시계를 하나 더 사고 스마트폰을 거실에 두고 잔다. 잠들기 직전에 카톡을 하고 싶을 때는 노트북으로 한다.
스마트폰 의존증에서 벗어나자. 불쌍한 손목과 불행한 정신을 지켜주자.

* 파리에서 돌아오고 첫 한 주 간은 10시-12시에 고꾸라지듯 잠들었다가 4시 정도까지 잠을 못 자서 생체시계가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난 그게 시차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어제도 나는 여전히 3시 정도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망할. 어제 문득 이건 시차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경미한 불면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워 있으면 온갖 생각이 든다. 직업적으로 미래가 불안하고, 허비한 오늘이 아쉽고, 내일부터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하지만 결기가 부족한 스스로가 한심하고, 아침에 못 일어날 것이 두렵고, 만나고 싶은 얼굴들이 생각나고, 그 얼굴들이 정말 소중하지만 내가 그 얼굴들을 아주 가끔 떠올리듯 나 또한 그 얼굴들에게 가끔 떠오르는 존재일 텐데 대체 연락을 하고 만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고, 애인과 함께한 시간이 생각나서 너무 아프고, 내가 내려야만 했던 결정이 너무 잔인해서 화가 난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뻗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잡히던 손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울 수 있는 상태로 몇 분, 몇 시간을 보낸다. 매일 밤 어둠 속에 눈을 뜰 때면 보이는, 익숙하게 마련해놓은 내 방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다.

* 회복 중이라고 제목에 쓰기가 망설여졌다. 회복이라는 것을 말하기에 나는 아직 많이 아프고, 그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집에서건 길에서건 어디에서건 울먹일 수 있는 상태로 살고 있다.

* 어제 G를 만나서 간만에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왠지 깔끔했다. 감정적으로 힘들 때는 한국어 자아 말고 영어 자아로 살면 도움이 좀 될지도 모르겠다. 한국어는 감정을 극대화 시키는 면이 있는데 이건 단지 한국어가 내 모국어라서만은 아닌 것 같다.

* 동생이 부산에서 TV에 열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나는 이해가 잘 안 됐다. 대체 거기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 거지. 하지만 나도 사실 미디어에 중독되어 있다. TV가 아닐 뿐이지. 집에 있으면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늘 팟캐스트를 듣거나 음악을 듣고 있다. 요즘 가장 열심히 듣는 팟캐스트는 “요조 장강명, 책 이게 뭐라고”, “김생민의 영수증”, “JTBC 뉴스룸”, “WSJ Tech News Briefing”, “BBC Global News”, “MSNBC Rachel Maddow Show”, “CNN Amanpour”. 레이첼 매도우 쇼를 정말 열심히 듣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이 뉴스쇼에서 내게 유의미한 정보를 얻기가 힘들어져서 (미국 대선 시즌부터 상당히... 너무 미국 국내 정치 상황에 편중된 뉴스가 주류가 되어서 내게 효용이 떨어짐) 아만푸어를 구독하기 시작했는데 조만간 둘의 청취 빈도 순서가 뒤바뀔 것 같다.

* 어제 간만에 소맥을 좀 거하게 마셨더니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휘청이며 집에 걸어들어오다가 라면을 사들고 와서 끓여먹은 것 (아 이 빌어먹을 습관!), 그렇게 티비를 보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티비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중간에 깬 것, 목이 말라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는데 그러고 자려고 누웠더니 속이 불편해서 전부 토한 것, 그런 상태에서 한참 못 잔 것, 자려다가 한참 영국남자 영상이나 보며 시간을 보낸 것, 그렇게 자서는 1시반에야 일어난 것, 일어났더니 다행히 머리는 안 아팠지만 허리가 이상하게 뭉친 듯 여전히 아픈 것, 집이 다시 어지러워진 느낌, 저어어어언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라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밥은 제대로 먹자며 겨우 머리를 말리고 콩나물국밥을 먹고 들어오는 길에 충동적으로 커피를 마시러 왔다. 그리고 마음 먹었던 블로그 일기를 한 시간 넘게 쓰고 앉아 있다. 두 잔째의 리필 커피는 과테말라. 역시 이 카페 좋구나. 일기를 쓰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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