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 때문에 우울할 때가 있으면 때로는 일 덕분에 우쭐할 때도 생기는 법이다. 그러고보니 어떤 날은 회의 하나를 하면서 내 통역이 참 깔끔했다며 기분 좋아한 뒤 10분 뒤에 이어지는 다음 회의에서 이번 회의는 망했구나 이런 통역을 듣게 해서 참석자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 은행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이어지던 일상을 지금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듯, 지금 이곳에서의 업무도 아주 핵심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잊혀질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좀 적어둬야지.

어제는 떠오르는 햇살을 헤쳐가며 참석한 아침 회의를 마친 후 앤디가 "Your translation was flawless"라며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찬사와 함께 고마움을 전해주었다. 물-론 flaw가 어마무시하게 많았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지만(...) 적어도 듣기 불편하거나 의심이 가는 통역은 아니었음에, 그리고 굳이 그런 감사를 표현해준 사람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오늘은 H언니가 어제 차에서 들은 얘기라며, 클라이언트 측에도 버젓이 통역사가 있는데 왜 우리 통역사를 가져다 쓰는 거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I씨에게 J씨가 우리 통역사 실력이 더 좋기 때문이라 답했다고 전해주었다. 이것도 사실과는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날 고용한 측에서 통역팀 실력에 대해 큰 의심이 없고 모종의 착각마저 하고 있음을(...) 뜻하므로 기꺼웠다.


2. 

좋아하는 친구 Y가 첫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자주 연락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친구의 마음은 어떨까 자주 상상해본다. 그리고 전 직장을 나오던 때, 밤 늦게까지 컴퓨터를 붙들고 한 명 한 명 편지를 쓰던 그 시간을 되새겨본다. 친구에게 "네 마음이 섭섭하지 않게, 하고 싶은 만큼 고마움 다 표현하고 떠나오라"고 한 말은 그 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편지를 쓰던 순간 나에게는 분명 한 해를 함께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만큼의 애정이 있었지만, 그 애정은 훈훈한 기억으로 남길 정도의 것일 뿐 굳이 현실에서 더 이어나갈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아마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지막 근무일 며칠 간 이어지던 점심과 커피 약속 릴레이, 내 작별 편지에 대한 짤막한 문자 답장들, 그리고 몇 주 뒤에 한두 번 온 연락을 제외하고는 그 사람들과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거의 없었고 나는 내가 그들에게 크게 아쉽지 않았듯 그들도 나에게 크게 아쉽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마음을 주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들은 내가 굳이 없어도 상관 없는 조직 속의 삶을 이어가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그들에게 애정이 있을 때, 그 애정이 허락하는 선-시간, 돈, 에너지-에서 마음을 표현한 것은 잘한 일이다. 애정이 사라지고, 그런 애정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희미해지기 전에 흔적을 만들어 전달까지 했다는 걸로 내 한 시절에 대한 내 몫의 책임은 다 한 셈이다. 


퇴근 버스를 타러 나갈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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