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랜서 전향 후 본격적으로(?) 일한 지 딱 5주가 되었다. 운 좋게도 시작은 세미-프리랜싱 정도의 프로젝트가 있었기에 진짜(?) 프리랜서처럼 일한 것은 이제 겨우 2주 남짓. 프리랜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멘탈 관리라는 것을 매일 같이 느끼고, 곱씹고 있다. 지난 주 목요일 꽤 힘든 회의 통역을 마치고 자신감 상실한 뒤 금, 월, 화 이렇게 근무일 3일을 내리 놀고 나니 (월요일은 졸업식 때문에 일을 쳐낸 거였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 적어도 일주일은 놀아야 좀 놀았다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마인드컨트롤을 하려고 해도 묘하게 주눅이 들었다. 목요일에 망해서 이제 다신 나를 안 불러주는 건가 싶고 말이지. 아악. 그래서 오늘, 급히 들어온 일을 성공적으로 해치우고 나니 그저 일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당당한 기운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늘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다. 아무튼 오늘은 밥값을 벌었으니 기분 좋게 잠을 자겠다.
* 부산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모두가 아프시다. 부산에 병문안을 처음 간 날, 할머니 병실 번호를 엄마가 잘못 알려주셔서 헤매고 있었더니 접수처 간호사가 누구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할머니 이름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차마 "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더라?"라고는 묻지 못하고 병실 호수를 물어 찾아갔다. 그리고 이어 중환자실에 할아버지를 뵈러 갔는데 그때도 방문자용 가운을 걸치고 중환자실 문을 들어서자 길게 이어져 있는 여러 개의 병상 사이에서 할아버지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성함은 방금 간호사가 외친 걸 들어서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원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할아버지 얼굴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수많은 늙은 얼굴들은 모두 너무도 비슷하게 평온하고 섬뜩했다. 여기저기 병상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간호사에게 명확하지 않은 이름을 짐짓 익숙한 척 묻고 나서야 겨우 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분명 숨소리가 쌔근쌔근 들리고 그 숨이 내 얼굴에 와닿기도 하지만 정신은 어딘가 멀리 떠나버린 것 같은 할아버지를. 분명 초등학생 때 몇 번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 알아오기를 숙제로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샌가 두 분은 내 안에서 이름을 잃고 관계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할 때 굳이 수고스럽게 이름을 적어두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께는 그렇게 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슬퍼졌다. 그렇게 이름이 흐릿해질 때 쯤이 세상을 떠나는 때인 걸까, 하고. 10대, 20대의 젊은, 아니 어린 나는 이름의 상징적 중요성에 대해 그리도 집착했는데 언젠가 사람이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그만인 순간이 와버리는 걸까, 하고. 아직 서른밖에 되지 않은 나는 나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외할머니"로 저장되어 있던 할머니의 번호에 할머니의 성함 석 자를 추가했다. 소리내어 부르지 않더라도 늘 생각하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
* 내가 일신이 평안하고 단조로운 2018년 첫 두 달을 보내는 동안 동생은 큰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졸업, 취업, 이사를 한 방에 해치워버린 그녀. 생각해보면 나는 졸업 후 좀 쉬고 취업, 취업 후에도 이사는 한-참 뒤에나 최대한 버틸 때까지 버틴 다음에 했으니 사실 내 동생이 나보다 부지런하게 앞서 나간 셈이다. 그 과정(+라식 수술 후 약간의 케어)을 함께 하면서 참 많은 감정을 느꼈다. 깔끔하게 정리해서 쓰기에는 너무 사소하고 번잡스러운 감정/기억이라 생각나는 대로 적기로 한다. 우선 일요일의 졸업 사진 찍기와 부동산 새집 헌팅. 나는 학부 때 내 졸업 사진 미리 찍는 것도 쭈비가 하자고 해서 즐겁게 했지만 딱히 스스로 해야겠다는 필요를 느끼지는 못한 1인으로서 굳이 대학원 졸업 사진을 미리 찍어야 하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생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뭐든 무조건적으로 같이 해주고 싶었다. (그다지 잘 챙겨주지도 않는) 나말고는 딱히 연고가 없는 서울에서 2년 간 공부를 잘 마친 걸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고, 나 말고 누군가에게 같이 하자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안 왔으면 했다. 든든하게 받쳐주는 사람이 되자, 그렇게 생각하고 뭐든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말해주었다. 그 덕분에 동생 애인이랑 밥도 한 번 더 먹었고.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내 애인이 부모에게 '내키지 않는 사람' 취급 받는 게 싫었던 기억 때문에 그래도 최대한 참아봤다. (싫은 티를 하나도 안 냈다고는 말 못하겠다...ㅋㅋ) 그랬더니 또 은근 사람이 나쁘지 않은 면도 있었고... 짐꾼이 필요하기도 했고... 호호. 그리고 부동산 투어. 여기서는 내심 억울함도 없잖아 있었다. 내가 무슨 부동산 구루도 아닌데 한 번 먼저 해봤다는 이유로 사소한 연락을 내게 하곤 하는 엄마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엄마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엄마야 마음 같아서는 내가 할 때나 동생이 할 때나 늘 옆에 끼고 도와주고 싶으셨을 텐데, 그런 여건이 안 되는데 나에게는 딱히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많이 도와주지는 못하셨지만 동생의 경우는 내게 도와주라면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왠지 가족과의 일이라면 과민하게 아이처럼 반응하게 된다. 아이 같은 질투, 억울함 같은 것을 두 사람에게 휘두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다 잘 막아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꼭 억울하기만 할 필요도 없는 것이, 나도 딱히 동생이 혼자 고군분투하면서 나처럼 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상황이 된다면 늘 돕고 싶다, 스스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고삐를 거머쥐어야 할 만큼. 이중적인 감정이지만. 그리고 나는 그래도 서울에 손 뻗으면 밥 한 끼 같이 할 사람은 많이 있는데 동생은 그렇지 않으니까. 부동산 차를 타고 실없는 소리를 하며 이동할 때, 새 집을 볼 때, 그리고 성공적 헌팅을 노래하며 밥을 먹을 때 어쩔 수 없이 서울의 동서를 가르며 어색하게 부동산 차를 타고 홀로 이동하던 것이나, 집을 보다가 정말 이런 데서 나보고 살란 말이냐고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던 순간을 홀로 견딘 것이나, 서울을 강타한 강추위 속에 여러 채 집을 보고 방에 돌아가 홀로 편의점 도시락을 먹던 순간 같은 것이 떠올랐지만, 그렇게 해도 다 괜찮다는 걸 알지만, 그게 어떤 기분인지 뻔히 알면서 동생에게도 똑같이 하라고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만 동생과 같이 집을 보러 다닌 그 순간들이 좋기도 했다. 언니로서의 나의 쓸모가 입증되는 어떤 뿌듯함과, 내가 딱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이에 동생이 이런 사람으로 지내고 있구나 발견하는 즐거움과, 그런 의미 같은 것을 굳이 찾지 않아도 함께 있으면 편안한 아늑함 사이를 오가며. 그 다음은 졸업식. 졸업식 때는 뭔가 내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다. 아빠에게 엄마 대신 든든한 큰딸, 동생에게 든든한 보호자, 동생의 연구실 동료들에게 사람 좋은 가족으로. 특히 '동생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이건 내가 내 졸업식 때 엄마에게서 느꼈던 것을 동생도 빠지는 것 없이 누리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학부든 대학원이든 졸업식 때 엄마가 왔을 때 나는 엄마가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것만큼 엄마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당연히. 하지만 내가 친구들과 사진 찍고 학사모를 던지고 난리부르스를 추다가 뒤를 돌아보면 엄마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경험을 통해 배웠다. 졸업식의 보호자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그게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정답이란 건 아니지만 내가 누렸던 그 느낌을 동생도 대학원 졸업식에서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눌 이야기도 웃을 거리도 많은데 짐 따위에 신경쓰지 않게 짐을 들어주고, 나중에 보면 이런 순간이 있었구나 싶도록 의도치 않은 사진을 찍어주면서. 좀 더 속내를 얘기하고, 졸업이 어떤 느낌인지 감상을 나누고 했어도 좋았겠지만 그러면 내가 울어버릴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왜 내게 이렇게 복잡한 감정이 드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사람들에게 기를 빨린 채로 집에 돌아와 커피숍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고 IPTV로 영화를 보다가 잠들었다. 그 다음은 동생의 이사. 내가 이 집으로 이사했을 때 엄마가 왔던 것을 떠올리며 동생에게 도움을 주려고 굳이 짐을 싸서 나섰다. 하지만 내 집 청소도 하기 귀찮은데 남 집 청소를 해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불의의 사건도 있긴 했지만 대충 돕는 시늉만 하고 나온 것 같은 느낌도 약간 든다. 실제로 청소만 하기 위해서라면 안 갔을지도 모를 만큼 나는 지쳐있었고. 하지만 휘몰아치는 스케줄에 분명 정신없이 식사도 제대로 안 하고 반나절을 났을 동생을 생각하니 밥 한 끼라도 제대로 사먹이고, 함께 먹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게 이 날 동생네에 간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홀로 밥먹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지도 모르겠다. 동생이 혼자 밥 먹을 걸 생각하면 늘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걸 보면. 이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나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내가 같이 살아주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더 열심히 도왔다"고. 그렇다고 산술적으로 빚 갚듯이 자 이제 나는 빚을 청산했어! 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분명 같이 사는 안에 대해 거듭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게 내 마음에 쉽지는 않았던 게다. 나는 분명 동생을 아끼는데, 같이 사는 것은 정말 잘 모르겠다. 살아야 한다면 잘 살겠지. 같이 있으면 많이 웃기도 하고, 정말 편안하고 즐겁기도 하고. 그런데도 결정은 차마 그렇게 내려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오해할까봐 무서웠던 것도 같다. 내가 거절하는 이유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서라고. 일련의 과정을 함께 하면서, 그런 건 아니라고 행동으로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정신 건강을 지키고, 나의 충동적 성향을 풀어놓을 공간을 마련해두고, 동시에 강박적 성향을 펼칠 체계를 잡아두는 게 정말 중요해서 차마 너에게 흔쾌히 같이 살자고 말하기는 망설여지지만, 그게 너의 잘못은 아니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동생에게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에 내 마음도 영향을 받아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특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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