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내게서 글이 나오게 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그로 인해 내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샘솟는, 그런 상상을 했다. 하지만 내게서 글을 자아내는 남자는 어김없이 나를 불행하게 했다. 오직 나를 불행하게 하는 자만이 내 안에서 글을 뽑아낼 수 있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면 그 시작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뀔 거라고 기대하게 된다. 이곳에 내려올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새로운 직장, 새로운 환경. 나는 알콜중독에서 벗어날 것이고,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부단히 움직일 것이고, 글을 쓸 힘을 얻을 것이다. 분명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핵심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글을 쓰지 않는다.


그래도 직장생활을 시작한 첫 해 나를 강렬하게 지배하던 알콜중독에서는 벗어났다(고 본다). 여전히 나는 술을 사랑하고 술 생각이 나는 순간이 아주 잦지만 그래도 중독의 굴레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다. 몇 주 차였던가, 이곳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을 읽으며 내가 중독이 맞긴 했구나 오싹하게 느끼던 때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다행이다. 


요즘 나의 일상을 구성하는 공간은 갈갈이 찢어져 있다. 정기적으로 사용하는 칫솔이 네 개. 그만큼의 공간에 꾸준히 자취를 남기고 사는 것은 사실 내게 한 군데에 정박하여 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여러 공간에 걸쳐 있는 만큼 다른 공간을 핑계 삼아 한 공간에서 손쉽게 도망을 꾀할 수 있다. 아니, 도망을 꾀할 수 있다고 느낀다.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구멍을 내어놓은 기분이 든다.


도망갈 곳이 없다고 느꼈던 시절과 도망갈 곳을 여러 군데 확보해놓은 지금의 차이가 있다면, 모든 도망지가 결국 출발지와 같은 비율의 실망과 안정을 품고 있음을 체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의 실망에서 저곳의 안정으로 달아남을 도망이라고 정의하지 않기로 했다. 여러 형태의 실망과 안정과 실망과 안정 사이를 끊임없이 뛰어다니는 것을 도망이라고 한다면 매번 도망에 성공하고 있는 요즘이다.


내 칫솔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남자를 생각해본다. 만난 지 5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는 그는 내게 웃음만을 줄 뿐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는 않는다. 아주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반면 아주 냉정하기도 하고, 아주 배려심이 넘치기도 하고 아주 자기중심적이기도 하다. 지금 만나고 있으니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애가 대단한 지상 과제가 아니고 일상의 일부가 되어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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