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주에 남아있는 단 하나의 기록
바닷가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서울의 나태와 환락에서 멀어지면 책을 읽을 시간, 글을 끼적일 시간이 좀 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난 한 주 간 책을 펼치지 않았고 글도 쓰지 않았다. 환락보다 더 큰 문제는 역시 나태였던 건가. 일단 첫 주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하고 다음 주는 좀 부지런을 떨어 봐야겠다.
둘째 주, 수요일
바닷가에 내려오고 싶었던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인간이 귀찮아서였다. 서울 생활 9년차, 대학 사람들, 대학원 사람들, 땅고 사람들, 이런저런 인연이 닿아 내 인간관계망에 걸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지긋지긋해졌다. 하루의 9-10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쪼개는 게 너무 싫었다. 사실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싫었던 건 아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최소한으로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만나면 즐거운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시간에 비해 만나고 싶은 사람은 너무 많았고, 아무리 줄였다고 해도 여전히 “만나야만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람을 과하게 만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내 시간을 겨우 빼보아도 대부분은 맥주를 마시러 가서 신은 나지만 정신은 더 혼미해진 상태가 됐다. 술을 많이 마셨을 때 거칠어진 숨소리가 싫었고 숨에 섞여 나오는 취기도 싫었다. 웃기는 많이 웃는데 내가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일 하루를 쳐내는 심정으로 살았다.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셋째 주
그럴수록 런던에서의 생활이 자주 떠올랐다. 그곳에 있을 때는 모두가 나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었다. 무책임한 회피일지라도 그때가 그리웠다. 되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서의 시간 자체도 그리웠지만 그보다 그런 자유가 더 간절하게 그리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망가진 관계 같은 건 없었다. 떠나고 싶었다. 잠시만 이 일상의 자리를 비울 수 있다면.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고 모두에게서 잠시만 거리를 둘 수만 있다면. 런던에서, 나를 옭아매는 사회 생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나는 내 생활에 대한 통제를 거머쥐고서도 충분히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억지로 자유를 찾거나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런 감각이 필요했다. 나는 심심해지고 싶었다. 너무 심심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생활은 정반대였다. 너무 얽혀있는 관계들이 많고 움직여야만 하는 때가 많아서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이 나면 반드시 가만히 있고 싶어졌다. 그렇게 일상이 엉망인데, 일마저도 재미가 없었다. 일조차 나에게서 에너지를 빼앗아주지 않았다.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술을 정말 즐기긴 했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떤 남자를 좋아했고, 중독에 몸을 내맡기고도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일상에 크게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없었고, 중독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내 전문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에 대한 중독이었지만 나중에는 공간에 대한, 시간에 대한, 생각하지 않아도 됨에 대한, 술에 대한 중독으로 번졌다. 술을 마실 때면 마음이 편했다. 술을 마시고 있으면 좀 더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편하게 눈웃음을 칠 수 있었다. 나에게 접근해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혼자 앉아 술을 마시면서 어떤 질문을 해도 솔직하게 답해주겠다는 태도로 앉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 굳이 적대적일 이유가 있는 남자는 없었다. 나는 가능한 한 피상적이고 돌발적인 질문 몇 가지를 던질 준비만 하면 됐다. 그러면 분위기는 끝 간 데 없이 떠올랐고 나는 다음날이면 내가 어떤 질문을 했고 어떤 답을 들었는지 거의 모든 것을 잊었다. 아주 약간만 신경을 써서 핵심적인 몇 가지 내용만 기억하면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또 손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모든 것이 간편하고, 일시적이고, 뒤죽박죽이었다.
...보다시피 첫 주의 기대만큼 쓰지는 않고 있지만 길이는 길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쭉 회상식 일기를 쓸 예정이다. 천천히 허물어지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하고 싶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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