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와 지지난주에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결국 그냥 잠들었는데, 오늘은 꼭 써야겠다. 땅고 3주차.
첫시간에는 걷기와 락스텝, 락스텝턴, 둘째시간에는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4선), 크루쎄, 오초 아뜨라스, 오초 아델란떼, 그리고 오늘은... 이름은 모르겠지만 리더가 더블비트를 활용해 3선으로 걷는 법, 팔로워가 더블비트로 크루쎄를 활용해 정면으로 돌아오는 법, 오초 후 원을 그리며 도는 히로를 비웠다.
꽤 고민을 했지만 역시 시작하길 잘했다.
오늘은 수업 후 사람들과 식사를 했는데 탱고를 왜 배우기로 했냐는 질문을 받았다.
춤을 춘 경력이 없고 같이 배우러 온 사람도 없는 독특한 케이스라 궁금해들 하는 것 같다.
(나이도 꽤 어린 편인데 그건 그렇게 생각을 안 해주더라... 방학이라고 하니까 강사인 줄 안다...)
그 답은 2013년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끄적였던 일기(의 일부)에 있다.
2013. 12. 30
오늘 하루종일 탱고 강습 검색을 했다.
지금 이런 걸 해도 괜찮은 걸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때인 건 맞지만
총력이란 것을 더 크게 하려면 그 일 외에 다른 몰두할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안다면 그에 따라 행동해야지.
바로 일을 시작한 친구들을 보면 지금 나는 아주 비싸지만 정말 근사한 유예기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날의 차 안에서 "런던에 있는 동안 그 시간이 정말 좋은 시절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라 말하는 쭈비의 말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심정이 된 것을 기억한다.
생각만으로도 좋았던 시절.
그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거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 언제든 과거를 추억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은 시절.
좋은 시절임을 알고 즐겼는데도 매번 더, 더 즐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듯 넋두리를 늘어놓게 되는데
지금이 얼마나 좋은 시절인지 늘 마음에 새기지 못한다면
그래서 최고로 즐기지 못한다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게 될까.
그래서 결론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나중에 모두 잊게 된다 할지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탱고를 배우자.
...이런 마음이었다.
지금 다시 보니 또 새롭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첫 수업 시간에 내게 탱고를 왜 배우기로 했냐고 물었던, 한번 듣곤 홀연히 사라진 여자분에게는
영화 해피투게더를 보고 멋있어서 배우기 시작했다 했고 누군가에게는 여인의 향기를 보고 멋있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오늘은 방학이라 뭘 할까 하다가 배우게 됐다고 얘기하다가 무슨 연결고리로 그렇게 넘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런던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돌아와서부터 몸도 '나'의 일부라는 걸 자각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춤에 전혀 관심 없었지만 이렇게 춤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내가 알다시피 늘 스킨십에 목말라하는 인간인데 그런 상태에서 겨우내 쓸쓸한 방학을 보내다보면
또 어떤 황폐한 정신 상태가 돼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런데 난 이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건강한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타인과의 접촉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땅고를 선택했다 했다.
지금 다니는 스튜디오를 선택한 것도 수많은 강습소 사이트 중 이곳이 가장 깔끔하게 커리큘럼 정리가 되어있었다는 것 외에도
"땅고, 안아주세요~"라고 적혀 있는 대문 문구가 내 간지러운 구석을 긁어주어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였다는 건 아무한테도 말 안했다.
이 중 단 한 부분도 거짓은 없다.
그리고 12월에 쓴 일기에는 '총력을 극대화하는 방편'인 양 써 놨지만 (그리고 물론 일리있는 말이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그래서 아까 질문에 답을 할 때 저 일기가 생각도 안 난 것이겠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토막토막 적어두고 자려고 한다.
1.
땅고는 춤의 무덤이라 한단다.
요람 근처에도 안 가보고 바로 무덤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춤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시작한 게 아니라 위의 저런 것들이 이유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몸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땅고가 나에게는 당장 무덤으로 뛰어들어 죽어도 좋을만큼 딱 맞다.
2.
땅고에서 팔로워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리더의 발소리를 듣는다. 음악은 리더를 통해 듣는 것이다.
3.
오늘 밥을 먹으면서 들은 얘긴데
팔로워는 정말 좋은 리드를 받았을 때의 그 희열이 정말 엄청나다고.
그래서 그 느낌을 못 잊고 밀롱가에서 좌절을 경험한 다음에도 결국 또 땅고를 추게 된다고.
그리고 리더는 팔로워에게 그런 희열을 안겨주었다는 만족감으로 춤을 춘다고.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섹스에 대해 몇몇 남자들이 하는 소리와 똑같네. 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어서 그래서 땅고를 섹스에 빗대어 자주 얘기한다고.
끄덕끄덕.
4.
첫시간에 땅고를 춤이라기보다는 스포츠로 생각하고
후드티에 바지, 심지어 추리닝바지까지 따로 챙겨갈 만큼 편하게 입고간지라 나를 잡아주러 먼저 다가오는 남자가 없어서
춤이라곤 춰본 적이 없는 내가 한동안 리더를 하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성비가 안 맞았음.)
그러든지 말든지 수업은 계속 진행됐고 중간에 누가 선생님께 얘기를 해줘서 팔로워가 될 수 있었다.
아 근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데 말했다시피 성비가 안 맞아서 파트너가 없는 여자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파트너 체인지를 하면서 남자가 다가왔는데 나와 내 옆 여자, 둘이 손이 비어 있었다.
남자가 내 손을 잡아서 홀딩을 하고 춤을 추기 시작하려는데
왠지 그 다른 여자분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난처한 제스처를 취하자
마침 옆을 지나가던 선생님께서
"미안해하지 말아요. 춤 춰요."라고 단호하게 얘기하고 가셨다.
인상깊은 사건이었고 덕분에 춤을 출 때 내 태도도 좀 달라졌다.
남이사 어떻게 되든, 파트너가 나를 선택했고 나는 이제 이 사람과 호흡을 맞춰야한다. 오로지 이것만이 중요하다.
이런 마음으로 춰야 한다는 걸 깨달은 느낌.
당신과 나 말고 다른 건 다 튕겨내도 된다는 느낌으로, 지난주와 오늘의 연습에 임했다.
5.
땅고에서 중요한 것은
축을 유지하는 것.
몸을 꼿꼿이 세우는 것.
마음대로 발을 바꾸지 않는 것.
몸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고 상체를 상대방에게 향할 것.
돌 때는 깔대기를 엎어놓은 듯한 느낌으로.
여자는 배를 챙겨갈 것.
프레임을 유지할 것. 그러나 과하게 힘을 주지는 말 것.
나의 존재감을 지킬 것.
리더보다 아주 미세하게 늦게 움직일 것. 먼저 움직이는 것, 예측하는 것은 금물.
크루쎄는 부자연스러운 동작이지만 언제든 해야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 것.
6.
춤동작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면 마치
건강한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이 춤이 더 매력적이다.
관계가 가장 중요한,
아름다운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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